시^^ 262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 / 나희덕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 / 나희덕 ​ 살았을 때의 어떤 말보다 아름다웠던 한마디 어쩔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그 말이 잎을 노랗게 물들였다. ​ 지나가는 소나기가 잎을 스쳤을 뿐인데 때로는 여름에도 낙엽이 진다. 온통 물든 것들은 어디로 가나. 사라짐으로 하여 남겨진 빛들은 아름다울 수 있었다. ​ 말이 아니어도. 잦아지는 숨소리. 일그러진 표정과 차마 감지 못한 두 눈까지도 더 이상 아프지않은 그 순간 삶을 꿰메는 마지막 한땀처럼 낙엽이 진다. ​ 낙엽이 내 젖은 신발창을 따라와 문턱을 넘는다. 아직은 여름인데.

시^^ 2022.10.25

너무 작은 심장 / 장 루슬로

작은 바람이 말했다 내가 자라면 숲을 쓰러트려 나무들을 가져다주어야지 추워하는 모든 이들에게 ​ 작은 빵이 말했다 내가 자라면 모든 이들의 양식이 되어야지 배고픈 사람들의 그러나 그 위로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작은 비가 내려 바람을 잠재우고 빵을 녹여 모든 것들이 이전과 같이 되었다네 가난한 사람들은 춥고 여전히 배가 고프지 하지만 나는 그렇게 믿지 않아 만일 빵이 부족하고 세상이 춥다면 그것은 비의 잘못이 아니라 사람들이 너무 작은 심장을 가졌기 때문이지.

시^^ 2022.08.08

꽃잎 / 에이미 로웰

꽃잎 / 에이미 로웰 (1874∼1925) 삶이란 흐르는 물결 같아 우리는 심장에서 꽃잎을 뜯어 하나둘 물 위에 뿌린다. 결말은 꿈속에서 길을 잃고 꽃잎은 시야를 벗어나 떠내려가니 우리는 기쁘게 시작된 삶의 시작만 바라 볼 뿐이다. 희망을 가득 품고 기뻐 빰을 붉히며 갓 피어난 장미 꽃잎을 뿌린다. 얼마나 넓게 퍼질지 얼마나 멀리 가 닿을지 우리는 절대 알지 못한다. 꽃잎은 모두 강물을 따라 흘러 흘러 무한한 길 저 너머로 사라진다 세월이 서둘러 가는 동안 우리는 홀로 남겨지고 향기는 여전히 머무는데, 꽃잎은 저 멀리 흘러가고.

시^^ 2022.08.08

마지막 아침 식사 / 자크 프레베르

마지막 아침 식사 / 자크 프레베르 ​ 그는 커피잔에 커피를 따랐지 그는 커피잔에 우유를 부었지 그는 우유 탄 커피에 설탕을 넣었지 그는 작은 스푼으로 커피를 저었지 그는 커피를 마시고 잔을 내려놓았지 말 한마디 하지 않고 그는 담배에 불을 붙였지 그는 담배 연기로 동그라미를 만들었지 그는 재털이에 재를 털었지 내게 말 한마디 하지 않고 내게 눈길 한번 주지 않고 그는 일어섰지 그는 머리에 모자를 썼지 비가 내리고 있었기 때문에 비옷을 걸쳐 입었지 그리고 그는 떠났지 빗속으로 한마디 말도 없이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그래서 나는 두 손에 얼굴을 파묻고 울었지 ​ ​

시^^ 2022.08.08

빈들의 저녁 / 이재훈

빈들의 저녁 / 이재훈 혼자 남을 때가 있다 아무도 없고 아무 가진 것도 없이 두려운 가난만 남아 저물 때가 있다 무리를 떠나 빈 방에 돌아와 두부 한 조각에 막걸리를 들이킬 때 빈속에 피가 돌고 몸이 뜨거워질 때 문득 빈 것들이 예쁘게 보일 때가 있다 조금 더 편하기 위해 빚을 지고 조금 더 남기기 위해 어지러운 곳을 기웃거렸다 가진 것 다 털고 뿌리까지 뽑아내고 빈들이 된 몸 빈 몸에 해가 저물고 잠자리가 날고 메뚜기가 뛰어 다닐 때 아름다운 것을 조금쯤 알게 되었다 남은 두부 한 덩이 놓고 저무는 해를 볼 때 세상의 온갖 빈 것들이 얼마나 평온한지 얼마나 아름답게 우는지 서로 자랑하듯 속을 비워내고 있다

시^^ 2022.05.25

물의 결가부좌 / 이문재

물의 결가부좌/이문재 거기 연못 있느냐. 천 개의 달이 빠져도 꿈쩍 않는, 천 개의 달이 빠져나와도 끄떡 않는 고요하고 깊고 오랜 고임이 거기 아직도 있느냐. 오늘도 거기 있어서 연의 씨앗을 연꽃이게 하고, 밤새 능수버들 늘어지게 하고, 올여름에도 말간 소년 하나 끌어들일 참이냐. 거기 오늘도 연못이 있어서 구름은 높은 만큼 깊이 비치고, 바람은 부는 만큼 잔물결 일으키고, 넘치는 만큼만 흘러넘치는, 고요하고 깊고 오랜 물의 결가부좌가 오늘 같은 열엿샛날 신새벽에도 눈 뜨고 있느냐. 눈 뜨고 있어서, 보름달 이우는 이 신새벽 누가 소리 없이 뗏목을 밀지 않느냐, 뗏목에 엎드려 연꽃 사이로 나아가지 않느냐, 연못의 중심으로 스며들지 않느냐, 수천수만의 연꽃들이 몸 여는 소리 들으려, 제 온몸을 넓은 귀로 ..

시^^ 2022.04.29

한 개의 기쁨이 천 개의 슬픔을 사라지게 한다 / 류시화

한 개의 기쁨이 천 개의 슬픔을 사라지게 한다 / 류시화 ​ 이따금 나는 생각한다 무당벌레로 사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을 것이라고 아니, 삶이 더 가벼울 것이라고 더 별의 눈동자와 닮을 것이라고 멀리 날지는 못해도 중력에 구속받지 않을 만큼은 날 수 있다 혼자 혹은 무리 지어 날 만큼은 아무도 그의 삶에 개의치 않고 언제든 원하는 장소로 은둔하거나 실종될 수 있다 명색이 무당일 뿐 이듬해의 일을 점치지 않으며 죽음까지도 소란스럽지 않다 늦지도 이르지도 않게 도착한다 운 좋으면 죽어서 날개하늘나리가 될 수 있고 더 운 좋으면 무로 사라질 수도 있다 어떤 결말이 기다린다 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으니까 아니, 기꺼이 원하니까 큰 순환에 자신을 매맡기는 기술은 이들을 따를 자가 없으니까 지구에서 일만 오천 일을..

시^^ 2022.04.29

사랑에 빠진 자전거 타고 너에게 가기 / 김선우

사랑에 빠진 자전거 타고 너에게 가기 / 김선우 자전거 바퀴 돈다 바퀴 돌고 돌며 숨결 되고 있다 풀 되고 있다 너의 배꼽에서 흐르는 FM 되고 있다 실개천 되고 있다 버들구름 되고 있다 막 태어난 햇살 업고 자장가 불러 주는 바람 되고 있다 초록빛 콩꼬투리 조약돌 되고 있다 바퀴 돌고 돌며 너에게 가는 길이다 무엇이 될지는 알 수 없지만 모두 무언가 되고 있는 중인 아침 부스러기 시간에서도 향기로운 밀전병 냄새가 난다 밀싹 냄새 함께 난다 기운차게 자전거 바퀴 돌린다 사랑이 아니면 이런 순간 없으리 안녕 지금 이 순간 너 잘 존재하길 바래 그 다음 순간의 너도 잘 존재하길 바래 자전거 바퀴 돌리는 달리아꽃 빨강 꽃잎 흔들며 인사한다 다음 생에 코끼리 될 꿀벌 자기 몸속에서 말랑한 귀 두 짝 꺼낸다 방아..

시^^ 2022.04.29

차를 세우고 / 이수명

차를 세우고 / 이수명 어디에 차를 세울까 어제도 집 앞에 세우고 그제도 집 앞에 세우고 일주일 전에도 집 앞에 한 달 전에도 계속 계속 집 앞에 세우고 어김없이 그랬다. 그런데 오늘은 세우지 못했다. 집 앞에서 한 아이가 울고 있었다. 정면을 바라 보며 울고 있었다. 집 주위를 빙빙 돌았는데 한 바퀴 돌고 두 바퀴 돌았는데 계속 아이가 울고 있었다. 계속 거기에 있었다. 누군지 모르겠다. 어디에 차를 세울까 어두운 골목길에 차를 세우고 오니 아이는 없었다.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다. 왜 우냐고 물어보려 했는데 땅을 내려다보며 울지 않았다고 대답할지도 모르는데 사라져버렸다. 나는 집 안으로 들어갔다.

시^^ 2022.04.27

심정의 복사본 / 최정례

심정의 복사본 / 최정례 불이 꺼져도 연기는 머뭇거리듯 감정이 끝나지 못하고 머뭇거린다 흔들리는 것은 흔들리지 않는 것에게 붙잡혀 흔들린다 ​ 나무둥치에 붙잡혀서 반짝이는 것들이 호수에서 튀어오르는 빛줄기가 나의 항로를 반짝이며 따라온다 ​ 거기 있는 것들은 거기 있어야만 하는 것들 굳이 끌어당겨 내 것인 양 생각하는 이 심정의 끈적거림이 문제 ​ 붙잡혀서 흔들리는 나뭇잎들 그것이 내 생각의 벌떼라고? 아니다 나뭇잎은 그냥 나뭇잎일 뿐 심정의 복사본인 나뭇잎일 뿐 ​ 벗꽃 왕창 피었다 떨어지고 수없이 왔다 가는 4월 빚 갚고 갚는다 생각했는데 도저히 헤어날 수 없는 4월

시^^ 2022.04.27

열대야 / 최백규

열대야 / 최백규 ​ ​ 사랑이 사랑도 아닐 때까지 사랑을 한다 ​ 네가 물들인 내 밤이 너무 많다 ​ 전국적으로 별일 없이 해거름이 옮아가고 있다 ​ 우리는 각자 다른 야경을 바라본다 ​ 내일 전쟁이 일어난다면 행복한 사람들이 가장 먼저 울겠지 ​ 지난 주말에는 시외버스를 타고 외지의 동물원으로 소풍을 갔다 ​ 가만히 쓰러진 기린을 구경했다 ​

시^^ 2022.04.21

봄밤 / 안현미

봄밤 / 안현미 봄이고 밤이다 목련이 피어오르는 봄밤이다 노천까페 가로등처럼 덧니를 지닌 처녀들처럼 노랑 껌의 민트향처럼 모든 게 가짜 같은 도둑도 고양이도 빨간 장화도 오늘은 모두 봄이다 오늘은 모두 밤이다 봄이고 밤이다 마음이 비상착륙하는 봄밤이다 활주로의 빨간 등처럼 콧수염을 기른 사내들처럼 눈깔사탕의 불투명처럼 모든 게 진짜 같은 연두도 분홍도 현기증도 오늘은 모두 비상이다 오늘은 모두 비상이다 사랑에 관한 한 우리는 모두 조금씩 이방인이 될 수 있다 그해 봄밤 미친 여자가 뛰어와 내 그림자를 자신의 것이라 주장했던 것처럼

시^^ 2022.04.21

대충천사 / 임지은

대충 천사 / 임지은 ​ ​ ​천사가 있다면 자르다 만 핫케이크에 누워있을 텐데 아무도 알아보지 못해서 나만 안다 ​ 천사는 대충을 좋아한다 대충 싼 가방을 메고 피크닉 가는 것을 몇 개의 단어로 일기 쓰는 것을 좋아한다 ​ 그러니까 천사는 모든 것이 대충인 세계로 온 것 좋아해서 그어놓은 밑줄 위에 천사가 누워있다 ​ 내가 좀 전에 벗어 놓은 추리닝을 입고 있는 천사는 튀어나온 무릎만큼 상심한다 ​ 인간은 악취 위에 뿌린 냄새 같아서 향수로도 잘 감춰지지 않고 ​ 우리는 틀어놓은 음악을 함께 듣고 있지만 모두 자기 자신만 듣느라 천사가 곁에 있다는 걸 알지 못한다 ​ 나의 이어폰으로 놀러 온 천사여, 지금 그 기분을 벗지 말아요

시^^ 2022.04.21

가능주의자 / 나희덕

가능주의자 / 나희덕 ​ 나의 사전에 불가능이란 없다, 그렇다고 제가 나폴레옹처럼 말하려는 건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은 불가능들로 넘쳐나지요 오죽하면 제가 가능주의자라는 말을 만들어냈겠습니까 무엇도 가능하지 않은 듯한 이 시대에 말입니다 나의 시대, 나의 짐승이여,* 이 산산조각 난 꿈들을 어떻게 이어붙여야 하나요 부러진 척추를 끌고 어디까지 가야 하나요 어떤 가능성이 남아 있기는 한 걸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 저는 가능주의자가 되려 합니다 불가능성의 가능성을 믿어보려 합니다 큰 빛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반딧불이처럼 깜박이며 우리가 닿지 못한 빛과 어둠에 대해 그 어긋남에 대해 말라가는 잉크로나마 써나가려 합니다 ​ 나의 시대, 나의 짐승이여, 이 이빨과 발톱을 어찌하면 좋을까요 찢긴 살과 혈관 속에 남..

시^^ 2022.04.04

움직이는 숲 / 강신애

움직이는 숲 / 강진애 먼 나무가 걸어왔다 옹이진 무릎에서 방출되는 빛 나무는 멀어지면서 동시에 다가왔다 내 앞 어두운 나무들은 가파르게 뒤로 물러나는 듯했다 투명하게 사선으로 움직이는 소로 찌르는 향 재빨리 숨는 노루, 새와 벌레와 부러진 흙빛 둥치들까지 알 수 없는 기체가 얽힌 뿌리의 세계 내가 긁어모은 나뭇단을 흡수해버릴 듯한 덤불숲 단지 겨울을 나려 했을 뿐인데 나는 숲에 삼켜지고 나뭇단은 우르르 익사하듯 만년의 행간 사이 다른 숲으로 가라앉았다 그 속에 또 다른 절정이 있는 듯

시^^ 2022.03.25

수요일 / 윤은성

그는 배낭을 바로 멘다 여의도역에서는 어깨에 대해 쓸 것이고 그가 멀어지는 스크린도어에 대해 쓸 것이다 맑은 날들일 것이다 이사가 잦을 것이고 플라타너스는 또 가게들을 가리고 여름에 그 나무는 찢어진 입을 가진 천사들 같을 것이다 짧은 볕이라면 간혹 그대의 멈춰 있는 얼굴 안에 손을 넣어 보고 싶어질 것이다 횡단보도가 많고 영등포 가게 상가에서는 혼자 우는 그를 봤다 ■왜 "수요일"일까? 모르겠다. 왜 "그는 배낭을 바로" 메고 있는 것일까? 어딘가로 떠난다는 뜻일까? 이제 막 떠나려 한다는 의미일까? "바로"라는 단어를 염두에 두고 생각해 보면 어쩌면 여행 중이거나 이미 '떠나왔다'는 말이지 싶다. 그런데 시적 화자는 왜 그가 "여의도역에서는 어깨에 대해 쓸 것"이라고 추측하는 것일까? 그리고 "그가 ..

시^^ 2022.03.24

유리 행성 / 조온윤

유리 행성 / 조온윤 ​안경을 쓰면 더 멀리 상상하고 더 멀리 슬퍼하고 멀어지는 사람은 얼마나 멀리까지 뒷모습을 보여주는지 오랫동안 우리는 길고 긴 복도 같은 일인칭을 걷고 있었다 눈이 어두운 우리는 불빛만을 향해 걸어서 옆에 누군가 나란히 걷고 있으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었는데 눈이 어두워서 밤과 낮을 구분할 줄 모르는 심해어처럼 우리는 꿈과 꿈 아닌 것을 구분할 줄을 몰랐다 시선을 꺾는 순간 풍경이 되어 멀어지던 너는 마른 목초지였던가 폭설같이 빛이 내린 설원이었던가 눈을 자주 잃어버리던 네가 몸을 잃어버리고 안경이 되었을 때 나는 슬픔을 똑바로 보기 위해 안경을 썼다 그때부터 세상은 밤의 목초지, 오래된 설경 꿈과 꿈 아닌 곳 너무 빠르게 회전하는 행성 같아서 이렇게 어지럽고 비좁은 곳으로 너는 발을..

시^^ 2022.02.24

당신, 이라는 문장 / 유진목

당신, 이라는 문장 / 유진목 매일같이 당신을 중얼거립니다 나와 당신이 하나의 문장이었으면 나는 당신과 하나의 문장에서 살고 싶습니다 몇 개의 간단한 문장 부호로 수식하는 것 말고 우리에게는 인용도 참조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불가능한 도치와 철지난 은유로 싱거운 농담을 하면서 매일같이 당신을 씁니다 어느 날 당신은 마침표와 동시에 다시 시작되기도 하고 언제는 아주 끝난 것만 같아 두렵습니다 나는 뜨겁고 맛있는 문장을 지어 되도록 끼니는 거르지 않으려고 합니다 당신이 없는 문장은 쓰는 대로 서랍에 넣어두고 있습니다 당신을 위해 맨 아래 칸을 비우던 기억이 납니다 영영 못 쓰게 되어버린 열쇠 제목이 지워진 영화표 가버린 봄날의 고궁 입장권 일회용 카메라 말린 꽃잎 따위를 찾아냈습니다 이제 맨 아래 서랍이라면 ..

시^^ 2022.02.22

고마웠다, 그 생의 어떤 시간 / 허수경

고마웠다, 그 생의 어떤 시간 / 허수경 그때, 나는 묻는다 왜 너는 나에게 그렇게 차가웠는가 그러면 너는 나에게 물을 것이다 그때, 너는 왜 나에게 그렇게 뜨거웠는가 서로 차갑거나 뜨겁거나 그때 서로 어긋나거나 만나거나 안거나 뒹굴거나 그럴 때 서로의 가슴이 이를테면 사슴처럼 저 너른 우주의 밭을 돌아 서로에게 갈 때 차갑거나 뜨겁거나 그럴 때, 미워하거나 사랑하거나 그럴 때 나는 내가 태어나서 어떤 시간을 느낄 수 있었던 것만이 고맙다

시^^ 2021.11.16

11월의 나무 / 황지우

11월의 나무 / 황지우 11월의 나무는, 난감한 사람이 머리를 득득 긁는 모습을 하고 있다 아, 이 생이 마구 가렵다 주민등록번호란을 쓰다가 고개를 든 내가 나이에 당황하고 있을 때 환등기에서 나온 것같은 이상하게 밝은 햇살이 일정시대 관공서 건물 옆에서 이승 쪽으로 측광을 강하게 때리고 있다 11월의 나무는 그 그림자 위에 가려운 자기 생을 털고 있다 나이를 생각하면 병원을 나와서도 병명을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처럼 내가 나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11월의 나무는 그렇게 자기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나는 등뒤에서 누군가, 더 늦기 전에 준비하라고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고 생각했다

시^^ 2021.11.16

티끌이 티끌에게 / 김선우

티끌이 티끌에게 / 김선우 내가 티끌 한 점인 걸 알게 되면 유랑의 리듬이 생깁니다 나 하나로 꽉 찼던 방에 은하가 흐르고 아주 많은 다른 것들이 보이게 되죠 드넓은 우주에 한 점 티끌인 당신과 내가 춤추며 떠돌다 서로를 알아챈 여기, 이토록 근사한 사건을 축복합니다 때로 우리라 불러도 좋은 띠끌들이 서로를 발견하며 첫눈처럼 반짝일 때 이번 생이라 불리는 정류장이 화사해집니다 가끔씨 공중 파도를 일으키는 띠끌의 스탭 찰나의 숨결을 불어넣는 다정한 접촉 영원을 떠올려도 욕되지 않는 역사는 티끌임을아는 티끌들의 유랑뿐입니다

시^^ 2021.11.16

보르헤스의 시 / 안주철

보르헤스의 시 / 안주철 동그랗게 말린 시를 건네면서 보르헤스는 낭독을 부탁했다 대답 대신 동그랗게 말린 시를 서서히 펴고 시를 바라보았다 라틴어로 쓴 보르헤스의 시를 읽을 수 없었지만 계속 들여다보아도 긴장이 되거나 관객이 두렵지 않았다 시를 계속 바라보고 있는데 모르는 글자에서 꽃이 피기 시작했다 보르헤스도 관객도 나도 사라졌지만 꽃이 계속해서 자랐다

시^^ 2021.11.10

돌이킬 수 없었다 / 허수경

돌이킬 수 없었다 / 허수경 ​ 언젠가 돌이킬 수 없는 일이 있었다 치욕스럽다, 할 것 까지는 아니었으나 쉽게 잊힐 일도 아니었다 ​ 흐느끼면서 혼자 떠나버린 나의 가방은 돌아오지 않았다 ​ 비가 오는 것도 아니었는데 머리칼은 젖어서 감기가 든 영혼은 자주 콜록거렸다 ​ 누런 아이를 손마디에 달고 흔들거리던 은행나무가 물었다, 나, 때문인가요? 첼로의 아픈 손가락을 쓸어주던 바람이 물었다, 나, 때문인가요? 무대 뒤편에서 조용히 의상을 갈아입던 중년 가수가 물었다, 나, 때문인가요? ​ 누구 때문도 아니었다 말 못 할 일이었으므로 고개를 흔들며 그들을 보냈다 ​ 시간이 날 때마다 터미널로 나가 돌아오지 않는 가방을 기다렸다 ​ 술 냄새가 나는 오래된 날씨를 누군가 매일매일 택배로 보내왔다 ​ 마침내 터미..

시^^ 2021.11.02

오래된 기도 / 이문재

가만히 눈을 감기만 해도 기도하는 것이다 ​ 왼손으로 오른손을 감싸기만 해도 맞잡은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으기만 해도 말없이 누군가의 이름을 불러주기만 해도 노을이 질 때 걸음을 멈추기만 해도 꽃 진 자리에서 지난 봄날을 떠올리기만 해도 기도하는 것이다. ​ 음식을 오래 씹기만 해도 촛불 한 자루 밝혀놓기만 해도 솔숲 지나는 바람 소리에 귀 기울이기만 해도 갓난 아기와 눈을 맞추기만 해도 자동차를 타지 않고 걷기만 해도 ​ 섬과 섬 사이를 두 눈으로 이어주기만 해도 그믐달의 어두운 부분을 바라보기만 해도 우리는 기도하는 것이다 바다에 다 와가는 저문 강의 발원지를 상상하기만 해도 별똥별의 앞쪽을 조금 더 주시하기만 해도 나는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만 해도 나의 죽음은 언제나 나의 삶과 동..

시^^ 2021.1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