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릇1/오세영 그릇 1 - 오세영 깨진 그릇은 칼날이 된다. 절제와 균형의 중심에서 빗나간 힘, 부서진 원은 모를 세우고 이성의 차가운 눈을 뜨게 한다. 맹목의 사랑을 노리는 사금파리여, 베어지기를 기다리는 살이다. 상처 깊숙이서 성숙하는 혼 깨진 그릇은 칼날이 된다. 무엇이나 깨진 것은 칼이 된다.. 시^^ 2012.04.25
뼈 아픈 후회/ 황지우 슬프다 내가 사랑했던 자리마다 모두 폐허다 완전히 망가지면서 완전히 망가뜨려놓고 가는 것; 그 징표 없이는 진실로 사랑했다 말할 수 없는 건지 나에게 왔던 사람들, 어딘가 몇 군데는 부서진 채 모두 떠났다 내 가슴속엔 언제나 부우옇게 이동하는 사막 신전; 바람의 기둥이 세운 내.. 시^^ 2012.03.17
사랑하는 사람들만 무정한 세월을 이긴다./나태주 사랑하는 사람들만 무정한 세월을 이긴다 - 나태주 - 사랑하는 사람들만 무정한 세월을 이긴다 때로는 나란히 선 키 큰 나무가 되어 때로는 바위 그늘의 들꽃이 되어 또다시 겨울이 와서 온 산과 들이 비워진다 해도 여윈 얼굴 마주보며 빛나게 웃어라 두 그루 키 큰 나무의 하늘 .. 시^^ 2012.02.22
하 루/김용택 하루/김용택 하루 종일 산만 보다 왔습니다 하루 종일 물만 보다 왔습니다 환하게 열리는 산 환하게 열리는 물 하루 종일 물만 보고 왔습니다 하루 종일 산만 보다가 왔습니다 하루/김용택 날이 흐리다 눈이 오려나 네가 겁나게 보고 싶다 하루/김용택 어제는 하루종일 바람이 불.. 시^^ 2012.01.29
울음이 타는 강/박재삼 울음이 타는 강/박재삼 마음도 한자리 못 앉아 있는 마음일 때 친구의 서러운 사랑 이야기를 가을 햇볕으로나 동무 삼아 따라가며 어느새 등성이에 이르러 눈물 나고나 제삿날 큰집에 모이는 불빛도 불빛이지만 해 질 녘 울음이 타는 가을 강을 보것네 저것 봐, 저것 봐, 네 보람도.. 시^^ 2011.12.09
.. 우리의 갈비뼈 하나를 뽑아 진실을 만드세요, 하느님. 그녀와 손잡고 거리로 나가겠습니다."(진은영) "공기 속에서 온통 비린내가 납니다. 없는 문이라면 그려서라도 열어젖혀야겠습니다."(신해욱) 탄생하지 않은 그것과 손잡고 걷겠다는 것. 없는 문을 그려서 그것을 열겠다는 것... 시^^ 2011.12.06
끝나지 않은 것에 대한 생각 끝나지 않은 것에 대한 생각 신해욱 누군가의 꿈속에서 나는 매일 죽는다 나는 따뜻한 물에 녹고 있는 얼음의 공포 물고기 알처럼 섬세하게 움직이는 이야기 나는 내가 사랑하는 것들을 하나하나 열거하지 못한다 몇번씩 얼굴을 바꾸며 내가 속한 시간과 나를 벗어난 시간을 생각.. 시^^ 2011.12.06
옥상/권여원 옥상 / 권여원 내 신혼의 꿈은 옥상에서 시작되었다 스티로폼 상자에 심은 부추와 과꽃은 철따라 피고 화분 하나는 옥상을 지키는 대문이었다 옥탑방이 할 수 있는 건 하늘을 끌어당기는 일 밤하늘의 별은 붙박이장이고 그믐달은 내일을 꿈꾸게 하는 베개였다 대리운전을 했던 신.. 시^^ 2011.11.11
[스크랩] 홍대입구역 플랫폼에 있는 스승님의 "달을 듣다" 서울 지하철 2호선 홍대입구역 계단으로 플랫폼에 내려서면 바로 중앙에 "달을 듣다" 가 있습니다. 도시 속 현대인의 스쳐지나는 삶의 표지같은 지하철 플랫폼에 잠시 굉음들을 모두 잠재우고 무논에서 첨벙거리는 달빛 물소리가 지친 걸음들을 위로합니다. 미소 머금으며 행복했.. 시^^ 2011.11.11
밤에 용서라는 말을 들었다 밤에 용서라는 말을 들었다 / 이진명 나는 나무에 묶여 있었다. 숲은 검고 짐승의 울음 뜨거웠다. 마을은 불빛 한 점 내비치지 않았다. 어서 빠져나가야 한다.몸을 튀들며 나무를 밀어댔지만 세상 모르고 잠들었던 새 떨어져내려 어쩔 줄 몰라 퍼드득인다. 발등에 깃털이 떨어진다... 시^^ 2011.11.02
단풍드는 날 / 도종환 단풍 드는 날 버려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순간부터 나무는 가장 아름답게 불탄다 제 삶의 이유였던 것 제 몸의 전부였던 것 아낌없이 버리기로 결심하면서 나무는 생의 절정에 선다 방하착(放下着) 제가 키워온, 그러나 이제는 무거워진 제 몸 하나씩 내려놓으면서 가장 황홀한 빛깔로 우리도 물.. 시^^ 2011.10.23
자/강정애 자杍 /강정애 불안한 걸음은 끝내 불안한 걸음으로 눕는다. 방에 불을 빼는 예의로 시작된 아침 수체垂體가 멈춘 방에 몇몇이 둘러앉았다 누구도 살아서 등을 재는 일이 없을 것이다 누울 곳, 마지막 걸음이 닿은 부위에서 한 생애의 길이가 줄자 안으로 드르륵 말려 들어간다. 생전의 의복을 벗겨낸 .. 시^^ 2011.10.01
귀명창 / 장석주 귀명창 - 장석주 마당 가장자리에 풀들이 은성하다. 바랭이, 명아주, 달맞이꽃, 강아지풀, 쇠뜨기, 비름, 환삼덩굴들이 연합전선을 펼치며 마당을 노리고 있다. 며칠을 소강상태로 관망하는데, 풀들의 기세가 등등하다. 마침내 풀들의 침공이다. 정토 습격이다. 맹하 대공세다. 이 영토 분쟁에 휘말린 .. 시^^ 2011.10.01
뚱뚱한 여자 / 김기택 뚱뚱한 여자 김기택 눈을 떠보니 어느 작고 어둡고 뚱뚱한 방 안에 들어와 있었다. 뒷덜미에서 철커덕, 문 잠기는 소리가 들렸다. 머리가 너무 크고 무거웠으므로 끊임없이 마음을 낮게 구부려야 했다. 창문을 찾아 기웃거릴 때마다 몸에 착 달라붙어 있는 벽도 따라 움직여서 어디가 바깥인지 알 수가.. 시^^ 2011.06.10
사평역에서... 사평역에서 / 곽재구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톱밥 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줌의 톱밥을 불빛속에 던져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시^^ 2011.06.09
꽃바구니 -- 나희덕 꽃바구니 나희덕 자, 받으세요, 꽃바구니를. 이월의 프리지아와 삼월의 수선화와 사월의 라일락과 오월의 장미와 유월의 백합과 칠월의 칼라와 팔월의 해바라기가 한 오아시스에 모여 있는 꽃바구니를. 이 꽃들의 화음을. 너무도 작은 오아시스에 너무도 많은 꽃들이 허리를 꽂은 한 바구니의 신음을... 시^^ 2011.06.02
라일락꽃이 뜰 안 가득 피었을때 라일락꽃이 뜰 안 가득 피었을때 월트휘트먼 라일락꽃이 뜰 안 가득 피었을때 그리고... 유난히 큰 별이 유성처럼 꼬리를 물고 서녘하늘로 떨어졌을때 나는 말 없이 흐느꼈다 그리고... 매년 돌아오는 봄이면 나는 또다시 말 없이 눈물짓고 있으리라 매년 돌아오는 봄은 늘 내게 세가지를 가져다준다 .. 시^^ 2011.05.19
숲으로 된 성벽 /기형도 숲으로 된 성벽 기형도 저녁 노을이 지면 신들의 상점엔 하나둘 불이 켜지고 농부들은 작은 당나귀들과 함께 성 안으로 사라지는 것이었다 성벽은 울창한 숲으로 된 것이어서 누구나 사원을 통과하는 구름 혹은 조용한 공기들이 되지 않으면 한걸음도 들어갈 수 없는 아름답고 신비로온 그 성 어느 골.. 시^^ 2010.09.11
찔레/문정희 -찔레/문정희- 꿈결처럼 초록이 흐르는 이 계절에 그리운 가슴 가만히 열어 한 그루 찔레로 서 있고 싶다. 사랑하던 그 사람 조금만 더 다가서면 서로 꽃이 되었을 이름 오늘은 송이송이 흰 찔레꽃으로 피워놓고 먼 여행에서 돌아와 이슬을 털듯 추억을 털며 초록 속에 가득히 서 있고 싶다. 그대 사랑.. 시^^ 2010.09.03
치마 / 문정희 치마 / 문정희 벌써 남자들은 그곳에 심상치 않은 것이 있음을 안다 치마 속에 확실히 무언가 있기는 있다 가만두면 사라지는 달을 감추고 뜨겁게 불어오는 회오리 같은 것 대리석 두 기둥으로 받쳐 든 신전에 어쩌면 신이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 은밀한 곳에서 일어나는 흥망의 비밀이 궁금하여 남.. 시^^ 2010.07.21
웃기 돌 웃기 돌* 김성춘 웃는 돌이 아니다 웃기는 돌이 아니다 장물에 오래 잘 길들여진 무거운 입술의 돌이 말한다, 화두 던지듯 -가라앉을 수 있을 때까지 당신의 길 가라 앉혀라 장물에 오래 잘 길들여진 가무잡잡한 돌의 입술 고행승 같은 돌이 말한다 - 향기의 끝 보일 때까지 향기로 걸어가라 해묵은 마.. 시^^ 2010.07.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