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설탕과 권력 / 시드니 민츠

지성준 2011. 10. 23. 15:18

 

★ 시드니 민츠의 설탕과 권력을 읽고...
■ 독서 후기
책을 읽고 난 후기를 솔직히 써보겠다. 처음에 설탕과 권력이라는 책을 도서관에서 집이 들었을 때 과연 설탕이 실제 사탕수수에서 나오는 단맛의 설탕을 얘기하는 걸까? 의아했다. 그러나 책을 펼친 순간 설탕이 그 설탕이었다. 순간 이야 이거 재미있겠는걸~ 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생각과는 달리 내용을 이해하는데 있어 아주 힘들고 혼란스러운 책이었다고 생각한다. 한낱 조미료에 불과하지 않은 설탕이 어떻게 우리의 식단의 중요한 요소로 자리 잡게 되었는가에 대해 얘기 하고 있으나 내용배열이 너무 어수선하여 혼란스러운 느낌을 많이 받았다. 그래서 내용연결이 잘 되지 않았다. 설탕의 생산과 소비와 그에 따른 설탕의 의미 변화에 관해 체계적으로 정리하기 매우 힘들었다.
이 책을 한번 읽고 서론 본론 결론으로 독서후기를 작성한다는 것은 더더욱 힘들 것 같다. 한 두 세 번은 다시 정독하여야 나름대로 구석구석 작가가 전달하려는 핵심을 이해할 수 있을 듯하다.
■ 시드니 민츠의 연구방법
이 책은 설탕이 어떻게 널리 보급되고 많은 사람들이 소비하는 식품으로 자리 잡았는가에 대해 아주 다양한 측면에서 살펴보고 있다. 저자는 이 문제를 단순히 사람은 누구나 단맛에 대한 무한한 욕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일축하지 않고 설탕의 수요가 어떤 방법으로 무엇 때문에, 어떤 여건하에서 증가하게 되었는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따라서 저자인 시드니 민츠는 역사 인류학을 강조 하고 있다. 사회적인 현상들은 본질적으로 역사적인 것이며 이는 곧 어떤 한 순간에 있었던 사건들 사이의 관계를 이야기함에 있어서 그 과거와 미래라는 배경으로부터 떼어내서 이야기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라고 그의 책 서장에서 분명히 말하고 있다. 그 중 설탕은 하나의 역사적 과정을 보여주는 전형이며 설탕의 역사는 최소한 유럽이 새로운 세계들을 찾아서 밖으로 밖으로 진출해 나갔던 기간만큼이나 오래되었다. 설탕의 역사를 통해서 보다 더 광범위한 세계를 설명하고자 하며, 그리 하자면 사람들과 사회들과 물질들의 관계가 변화해 온 긴 역사를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영국을 중심으로 설탕 소비의 역사, 특히 설탕이 상당히 일반화되기 시작한 1650년부터 설탕이 모든 노동계급 가정의 식탁에서 확고하게 자리를 잡게 된 1900년 사이의 역사를 살펴보았다. 설탕의 생산에서부터 어떻게 전파되었고 소비자들은 어떻게 그렇게 많은 소비를 하게 되었는지의 과정을 다양한 각도로 살피고 있다.

목차

서론 1) 독서 후기
2) 시드니 민츠의 연구방법

본론 1) 설탕의 생산과 보급
2) 설탕소비의 대중화
3) 설탕소비증가의 사회적 요인
4) 설탕의 의미변화
5) 자본주의에서의 설탕의 의미

결론 1)종합, 정리(설탕의 역사 = 인간사회의 역사!!!)

 

우리가 당연시하는 ‘경제적 사고’를 뒤집어보지 않는다면, 모순의 해소는 힘들다. “최초의 풍요사회”란 용어가 있다. 선진 자본주의 사회를 지칭하는 말이 아니라 반대로 수렵채집에 기반한 단순사회를 일컫는 말이다. 1960년대에 미국 인류학자들은 남아프리카 칼라하리 사막의 쿵 부족 부시맨을 사례로 수렵채집사회를 연구하였다. 예상과 달리 쿵 족이 섭취하는 식품의 종류는 다양했고 식사열량은 충분했으며, 노동시간은 일주일중 이삼일에 불과했다.

식량은 서로 나누었으며 고정된 지도자가 없는 평등사회였다. 이들이 현대인보다 훨씬 더 불행하고 불쌍할 것이란 기대는 완전히 어긋났다. 오히려 현대사회의 한계 없는 결핍감과 도덕적 퇴행을 지적하는 반증사례로 보였다. 그리하여 쿵 부족 같은 수렵채집사회에 붙여진 이름이 “최초의 풍요사회”이다. 무엇보다 이들은 일하기의 대전제가 공존과 협력이라는 점을 가장 잘 이해하고 충실히 실천한 역사적 사례이다.

우리사회로 돌아와 보자, 경쟁은 차별을, 효율은 착취를, 관습은 이중규범을 정당화할 수 없다. 고용 불안정과 이중 잣대에 의한 차별로 대다수의 사회성원이 불안한 마음으로 산다면 이야말로 불행한 사회가 아닌가. 국가비교조사 때마다 한국인의 행복지수가 하위권인 이유를 계속 외면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