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습기 없는 슬픔 / 김이듬

지성준 2018. 6. 6. 11:12

습기 없는 슬픔

 

                                                                 김이듬

 

 

 

   벽에 붙은 작은 사진들을 보며 걷다가 미로에 갇혔다

   조용한 여름이었다

   물이 천천히 떨어지기 시작했다

 

   거짓말로 시작했다 나는 빈소에 있는 수많은 학생 사진을 보며 발을 옮기다가 팽목항에 도착했다 들끓는 여름이었다 흐르는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 이렇게 사실대로 바꾸면 나는 다시 나의 절망과 죄책감을 더욱 견딜 수 없다 딴청을 부리는

 

   나의 습관은 자유이고 말과 눈물이 말라 처진 젖처럼 처참해도 할 수 없다 지금 나는 생각이 안 날 때 하는 습관대로 주먹을 꽉 쥐고는 두 주먹을 부딪쳐 뼈를 끼워본다 표정은 항상 어긋나며 조금은 남고 조금은 모자란다

 

   못 알아듣던 아버지는 조금씩 말문도 닫으셨다 자애 등급 때문에 검사원을 만났던 날에는 그의 질문에 어찌나 대답을 잘하시던지 참았던 오줌을 누기 시작하자 반시간 동안 멈춰지지 않는 사람 같았다 아버지의 장애 등급을 올려 지원금 받으려던 기대는 수포

 

   사랑하는 사람들은 꼭 나에게 되돌아왔다

   떠나겠다는 말을 하려고

   어둡고 슬프게

 

   내 머리는 받아들이는데 발끝까지 신호가 안 가서 산스크리트어를 외며 다리를 찢어보는 밤

   우울한 여름이 가고 더 우울한 달이 등 뒤에서 목을 조르는 밤 월광

   내 마음은 온몸 구석구석 흩어져 있어서 혹은 없어서 슬프지가 않다

 

   감정은 내가 가진 전부지만 설명하려면 누추

   문을 연다 닫지는 않는다 저절로 곧 닫힐 거니까

   아버지, 이 돈이 전부예요 다음 달에도 드릴게요

   나는 시작은 잘 한다 처음은 거짓말 같다

 

   나는 무에서 무를 창조하며 신보다 부자이고 신보다  고독하다

   신은 나이키

   혼자서 먹고 혼자서 걷는다 독보권을 누림

   미로 같고 구치소 같은 한밤의 복도에서

   얼마나 오래 울지 않았는지 헤아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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