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시월 / 허연

지성준 2018. 6. 2. 11:43

시월 / 허연


잊을 테니까 아프지 말라고 너는 어두운 산 그림자처럼 말했다 다시는 육지로 돌아오지 않겠다고 다시는 길게 앓지도 않겠다고 너는 낡은 트럭에 올라타면서 웃었다

매미들의 잔해가 마른 낙엽처럼 부서지고 있었다


마을버스를 세 대나 놓치며 정류장에 서 있었다 통화버튼을 누르지는 못했다 가까워졌다 멀어지는 자동차의 불빛들이 비현실적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전화기를 주머니에 꽂아넣었다


세상의 모든 느낌이 둔탁해졌다 입맞춤도 사죄도 없는 길을 걸었다 동네에서 가장 싼 빵을 굽던 가게 앞을 지나면서 다가올 날들에 대해 생각했다 방금 운 듯한 하늘이 짓누르고 있었다 


북쪽 어디에는 진눈깨비가 내렸다고 했다 저만치서 무성했던 풀들이 힘없이 시들어 갔다 실눈을 뜬 채, 담장 너머 검게 목이 꺾인 해바라기 밭을 바라보고 있었다 


혼자 했던 전쟁에서 늘 패하고 있었다 그걸 시월에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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