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내린 뒤 물이 고인 파리 생 라자르역에서 중절모를 쓴 한 남자가 고여있는 물웅덩이를 빠른 걸음으로 지나가기 위해 점프를 하는 순간.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은 이 장면을 놓치지 않았다. 이 남자의 모습은 수면에 반사된 그림자와 완벽한 대칭구조를 이루고, 뒤쪽 벽면의 포스터 속 무용수의 동작과도 대칭된다. 또 거대한 에펠 탑 위에서 춤을 추듯이 경쾌하게 움직이는 한 남자는 젊은 페인트 공. 지독한 가난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일하는 1950년대 젊은 노동자의 하루가 이상 야릇한 느낌을 선사한다. 그는 사진에 무엇을 담으려고 한 것일까.

ⓒ민중의소리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생- 라자르 역 뒤에서, 파리'(1932)
20세기 근대 사진의 증인이자 현대사진의 서문을 연 선구자. 세계적인 사진가 그룹 매그넘의 창립자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의 사진전이 세종문화회관에서 9월 2일까지 열린다. 브레송은 사진을 단순히 기록이 아니라 예술로 승화시켜 전 세계인들로부터 사진미학의 정점을 찍은 사진작가로 칭송받고 있다. 그의 사진들은 빨리 찍고 아무렇게나 버리는 디지털에 익숙한 현대인들에게 아날로그 흑백 특유의 따뜻한 감동을 선사한다.
브레송은 사건, 사고처럼 뭔가 특별한 이미지가 아니라 평범한 일상을 사진에 담았다. 또 피사체를 강조하거나 과장하는 표현들을 철저히 배격해 누구나 쉽게 공감하고 느낄 수 있도록 했다. 삶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인식하게 만드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던 그의 사진 철학 때문. 1937년 영국 조지 6세의 대관식 행사를 보기 위해 며칠 동안 줄을 섰다가 정작 행사 중에는 잠에 빠져버린 인물 사진은 그의 사진적 관점이 아주 잘 드러난다.
브레송의 사진 미학은 우연이 빚은 장면이다. 그는 예견치 못한 이미지를 소형카메라로 촬영해 정적인 공간에 시간성을 부여했다. 그래서 그의 사진은 멈춰진 한 장면이지만 운동성이 느껴지고, 동영상처럼 보여진다. 예를 들면 독일 냉전시대의 상징이었던 베를린 장벽의 의미를 전혀 모르는 아이들이 벽에 매달려 웃는 모습, 한 남성이 걸음조차 걸을 수 없는 아이를 손바닥에 올려놓고 천진난만하게 웃는 작품을 보면 전쟁에 대한 허무함과 함께 삶에 대한 희망이 동동시에 느껴진다. 특별하진 않지만 강한 여운이 남는 작품이다.
이번 사진전은 다섯 가지의 결정적 순간으로 구성돼 있다. 이 다섯 가지는 찰나의 미학, 내면적 공감, 거장의 얼굴, 시대의 진실, 휴머니즘으로 각 챕터마다 자세한 설명을 달아 관람객들의 이해를 돕는다.또 전시장에 들어가면 각 섹션이 하나의 룸처럼 꾸며져 있어 어렵지 않게 전시를 이해할 수 있다. 이밖에도 전시장에는 브레송의 사진에 게재됐던 '라이프'지 등을 비롯해 각종 인쇄물과 논문, 에세이, 사진집 등 125점의 개인자료도 전시돼 있다.
아이들과 함께 전시장을 찾은 김명옥(39) 씨는 "인터넷에서 봤던 브레송의 여러 사진을 현장에서 직접 볼 수 있어서 감동이다. 입장료가 비싸서 좀 부담스러웠는데 전혀 후회스럽지 않다"고 말했고, 대학생 이영일(26) 씨는 "사진을 잘 몰라서 그런지 사진예술에 대한 편견도 있었고 디지털 카메라에 대한 폄훼도 있었는데, 이번에 여지 없이 깨진 것 같다. 사진은 단순히 좋은 카메라로 찍으면 잘 나오는 것이 아니라 작가의 관찰력과 예술성을 담은 것 같다"고 밝혔다.
브레송은 단 한 번도 연출을 하지 않고 사진을 찍었다. 합성이나 효과도 내지 않았다. 그의 사진 속 모든 장면들은 철저하게 인간의 삶을 그대로를 끄집어낸 것이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자연스럽고 질감이 있다. 마치 한 편의 르포르타주와 마주한 느낌이다. 그의 작업이 많은 예술가들에게 불멸의 사진학 교과서로 인정받고 있는 이유도 바로 그것 때문이다.
방학을 맞아 아이들에게 뭔가 특별한 경험을 해주고 싶은 부모들에게 이 전시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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