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흙 (박경리문학제 최우수)

지성준 2010. 5. 11. 11:12

박경리선생2주기추모제 전국여성백일장 입상작(산문)

<최우수>

정영숙

내 등에 햇살이 간지럽다. 가리개 모자를 흔드는 봄바람도 해실해실 웃고 간다. 어머니는 소풍이라도 나온 양 도시락과 물을 챙기고, 쑥도 캐자며 칼과 바구니를 두 개나 가져왔다. 괭이로 흙을 뒤집어 놓고 어머니가 시키는 대로 숨바꼭질하는 풀뿌리와 잔돌을 골라낸다. 대여섯 평되는 밭이지만 그것도 쉽지 않다.

서툰 호미질로 흙을 가다릴 때 마다 흙내가 난다. 그 흙내가 참으로 상쾌하다. 날씨가 따뜻해서인가, 이름표가 붙은 작은 밭 곳곳에 사람들이 보인다. 시에서 공짜로 빌려 준 밭이니 그냥 둘 수 없어 다들 나왔으리라.

밭둑길 위에서 갑자기 조잘조잘 소리가 들린다. 유치원 아이들이 선생님과 함께 봄동산에 나들이를 나왔나보다. 그들이 지나가는 길가 나무들도 웃음을 참지 못하고 꽃가지를 마구 흔들고 있다. 산언덕에 핀 붉은 도화도 싱긋이 웃으며 내려다본다.

“안녕하세요~” 꼬마들이 나를 보고 합창인사를 보낸다. 난 두 손을 번쩍 들고 막 흔들었다. 웃음이 벙싯벙싯 난다.

‘아이고 아이고 귀여워라’ 내손이 그리 말한다. 꼬마들의 손이 반짝반짝 작은 별을 흔든다. 봄날의 왈츠다.

쿵작작 쿵작작~~

온 들판이 무도장 같다. 나와 꼬마들 그리고 홍도화가 손에 손을 잡고 왈츠를 춘다. 삼박자 음악에 맞춰 빙글빙글 트라이앵글을 만든다. 저만치 줄지어 피어 있는 하얀 배꽃과 노란 개나리는 봄 햇살로 빛나는 화려한 조명이다. 꼬마들의 웃음소리가 까르르 들리는 듯하다. 이렇듯 내 기분은 봄바람처럼 산들거린다.

흙을 고르는 호미에 절로 힘이 들어간다. 너무 재미있다. 어머니는 밭가를 돌면서 흙덩이를 부수고 나는 밭 안에서 풀뿌리를 골라낸다. 오랜만에 흙을 만지니 좋으신가 보다. 목소리가 흥에 겹다. 나는 괭이로 밭고랑을 만들기 시작했다. 고랑을 더 깊게 만들기 위해 열심히 호미질을 한다. 도톰하게 만들어진 이랑 위에 앉아 다시 흙을 고른다. 해 보지 않은 일이라서 그런가, 금세 허리가 아프다. 쪼그린 다리는 쥐가 나듯 저리고 이마엔 땀이 흘러내린다. 채 한 이랑도 다 다듬지 못하고 쉬기 일쑤이다. 대충 됐다 싶어 허리를 편다. 몸살이라도 할 것처럼 온 몸 여기저기가 아프다. 그래도 잘 다듬어 놓은 여섯 개의 이랑을 보니 생일날 받은 선물처럼 흐뭇하다.

산다는 것은 어쩌면 흙을 가꾸어 이랑을 짓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래야 원하는 씨를 뿌릴 수 있고 수확을 할 수 있을 테니까. 살아오면서 나는 어설픈 고랑만 만들다가 씨 한 톨 뿌릴 제대로 된 이랑하나 가꾸지 못하였다. 세월에 깎이어 있는 듯 없는 듯한 것도 있고, 잔돌과 풀리지 않는 흙덩이가 그대로인 곳도 있다. 또 만들다 만 어느 이랑엔 부스스한 잡초 속에 언제 날아와 막혔는지 제법 큰 돌멩이도 자리를 잡고 있다. 묵은 밭이나마 허물어진 이랑들을 다듬어 보겠노라고 마음을 다지지 않은 건 아니지만 그저 먼눈으로 바라만 보았다. 세상살이가 바빠서, 더러는 힘들어서, 더러는 기회가 없노라고 스스로에게 변명하면서.

아직 늦지 않았다. 내 밭엔 긴 미래와 이루지 못한 꿈이 숨 쉬고 있지 않은가. 버려두었던 밭을 일구어 허물어진 이랑들을 다시 가다듬는다. 이제 곧 새로운 이랑 하나가 생길 것이다. 그 이랑은 전에 없이 잘 다듬어 기름진 밭으로 지어 볼 것이다. 씨도 좋은 것을 골라 정성껏 뿌려야겠다. 그리하여 싹이 돋아나면 더 이상 잡풀에 묻히지 않게 잘 가꾸어 수확을 해 보리라.

옆 밭에 씨를 심던 아주머니가 다가와서 무얼 심을 거냐고 묻는다. 그제야 나는 ‘뭘 심어야 하지…’ 아무계획도 없는 자신을 깨달았다. 때맞춰 무엇을 심고 어떻게 가꾸어야 할지 모른다면 이랑을 지은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내가 되레 물었다. 봄에는 상추, 쑥갓, 열무 부추를 심으면 된다고 한다. 나는 그것들과 함께 저 구름 흘러가는 이랑에다 그리움도 심으리라.

봄날 하루, 내일은 씨를 뿌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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