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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좋은수필]?절정? / 김은주

지성준 2012. 10. 16. 14:56

절정 / 김은주

 

 

복사꽃이 흐드러진 길을 따라 폭포 굿당으로 접어들었다. 봄은 이울 대로 이울어 더는 발붙일 곳이 없는 지 꽃잎 떨어뜨릴 채비만 서두르고 있다. 꽃은 어디 그저 떨어지던가. 꽃술 아래 맺힌 열매를 위해 그 열기 뜨거운 햇살 받고 더 튼실하게 자랄 것을 염두에 두고 사라져 가는 것이리라. 현은 지금 칼날 같은 문지방 위에 서 있다. 지금껏 살아오던 익숙한 일상과 낯익은 공간을 단절한 채 이제 막 신령의 길로 접어들려 한다. 꽃잎 같은 삶을 버리고 나면 무슨 열매가 열릴는지. 관습에 젖은 일상을 버리지 않고는 혼령과 대화랄 수 없나 보다. 아무리 삶은 개척하는 대로 길이 열린다지만 현을 보고 있으면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다. 다가온 운명을 피해 보려 몸부림쳤지만 끝내 그 운명에 발목을 잡히고 말았다. 열 살이 되기 전부터 사람만 보면 간담 서늘한 이야기를 눈으로 본 듯 주워섬기더니 그 팔자를 끝내 뿌리치지 못했다. 목숨까지 내놓고 그 사슬에서 벗어나려 애썼지만 단 한 번도 운명은 현을 놓아주지 않았다. 식구들로부터 홀대를 받았고 몸은 신병으로 망가질 대로 망가진 다음에야 비로소 대(竹)를 세운 것이다. 휘어진 시골 길을 따라 걸어 들어가 보니 그곳에 현이 곱게 한복을 차려입고 내림굿 준비를 하고 있었다.

자신의 의지인지 아니면 어쩔 수 없는 등 떠밀림인지 몰라 나는 한참을 먼발치의 툇마루 끝에 앉아 그녀의 여린 등허리를 훔쳐봤다. 커다란 드럼통 양옆으로 놓고 하늘을 찌를 듯 대가 세워지고 오방색의 깃발이 내다 결렸다. 창공에 휘날리는 오색 깃발은 새로운 현의 길을 비질해 주듯 시원스레 흔들리고 있다. 그때 굿당 지붕 위에 철 이른 나비 한 마리 날아오른다. 노랑인지 흰색인지 분간이 어려운 나비 한 마리는 한참을 지붕 위를 선화하다. 굿당 뒤 야산으로 사라진다. 현은 평소 나비를 좋아했다. 연꽃 무늬나 나뭇잎 무늬의 촛대를 만들어 줘도 유독 나비 모양의 촛대를 좋아했다. 현이 무속의 길로 처음 들어섰을 때 도자기로 북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여러 차례 구웠지만, 염이 덜 들어갔는지 몇 번이나 터져 버리고 북을 완성하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하는 마음으로 한 것이 성공했다. 환성된 북의 몸체에 무형문화재인 어느 분이 가죽으로 옷을 입혀 주셨고 그 북은 우리들 사이에서 천상의 소리로 통했다. 도자기를 울리고 들려오는 북소리는 그 공명이 얼마나 맑고 투명한지 정말 하늘에서 들러오는 소리 같았다.

외롭게 걸어가는 현의 길에 북은 사심 없는 동반자이다. 그 북이 지금 남자 북잡이 손에 들려 있다. 이미 차려진 음식과 과일, 그리고 접신하였을 때 오렸다는 기하학적인 무수한 그림이 천장에 널어져 있다. 현은 고깔을 쓰고 한지로 오려 만든 채를 손에 들고 사물패의 풍악이 고조될 즈음 서서히 뛰어오르기 시작했다. 버선발이 방바닥에 닿기도 전에 다시 뛰어올랐다. 발끝이 보이지 않는다. 방 안의 기운이 격렬하게 고조되었다. 풍악이 잦아들 때쯤 북잡이 혼자 구성진 가락을 뽑아내기 시작했다. “에고에고 이 무슨 일인고, 어찌 내가 이 길로 들어섰을꼬, 청춘이 눈물겹고나, 어메어메 우리 어메 나 보내고 어찌살라요,” 격정이 절정에 다다르니 현이 어깨를 들썩이며 울기 시작한다. 뒷자리에 소리 없이 앉아 계시던 어머니도 꺼이꺼이 목을 뺀다. 골 깊은 울음을 달랠 생각도 않고 북잡이는 더욱 구성진 가락으로 현의 가슴을 친다. 지켜보던 이도 심장이 뜨거워져 온다. “지금 울지 않으면 언제 다시 울어 볼까? 산천에 뻐꾸기야 우리 같이 울어 보자.” 크게 울어 보라고 북잡이가 부추긴다. 아무도 달래 주지 않는 굿판에 엎드려 현은 목을 놓고 있다.

종일 굿패들은 현을 쉽사리 절정으로 데려가지 않는다. 서서히 달아올라야 제격인 무쇠 솥처럼 그녀의 감정을 격정 바로 앞에까지 끌고 갔다가는 다시 슬픔 안으로 잦아들게 하고 다시 격정 속으로 그녀를 끌어들이기를 반복하고 있다. 이 길로 들어서기까지 겪었을 그녀만의 괴로움을 다 토설케 한 후에야 절정을 맞이할 모양이다. 현의 몸은 오후부터 물먹은 솜이다. 가사 직전까지 간 현에게 그들은 서서히 작두를 준비시켰다. 서슬 퍼런 작두를 곡식 되는 말 위에 올려놓고 신어미는 현을 그곳으로 올린다. 비척이며 오르는 현의 다리가 떨린다. 굿판 내내 나는 현과 한 몸니되어 서러울 때는 울고 격정으로 치솟을 때는 같이 뛰어올랐다. 한 개인의 격정이 아니라 굿을 바라보는 집단의 절정을 체험하며 우린 다 같이 맺힌 응어리를 하나씩 풀어 나갔다.

섬뜩한 칼날 위에 그녀가 발을 올려놓는다. 예리한 칼끝은 세속이 끝나는 자리며 신령들의 세계가 시작되는 곳이다. 양손에 대를 잡고 그녀는 서서히 몰입의 순간으로 빠져 간다. 천지 사방을 둘러보며 뭇 신들을 불러 모은다. 초점 없는 눈은 먼 산을 보는 듯 몽롱하다. 출렁이던 그녀 어깨가 들썩이는가 싶더니 잠시 청공에 몸이 떠오른다. 오색의 무녀복이 바람에 휘감긴다. 나비 한 마리 날아오르듯 현의 몸은 가볍다. 그 아래서 북잡이가 추임새를 넣는다. “입을 열어라 입을, 누가 너를 막을손가 바람 부는 대로 꽃 잎이 날리는 대로 입을 열어 천지세계를 다 받아들여, 다시 내뱉어라.” 칼날 위의 그녀 발이 푸르다. 현은 지금 이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넘어가는 끝 지점에 서 있다. 이제 굿패들은 그녀의 절정을 막지 않는다. 하늘을 향해 치솟아 오르도록 풍악도 그 리듬이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빨라지다 순간 자지러진다. 그 리듬에 빨려든 나도 잠시 하늘 위에서 대를 잡은 듯 온몸에 전율이 인다.

절정의 극점에 다다른 그녀가 흐느끼듯 입을 연다. 뭇 신을 부르던 그녀 입에서 소리가 새어 나온다.

“봄꽃은 지는데… 봄꽃은 지는데 어찌할꼬. 어찌할꼬.”

기(氣)가 절정에 다다른 듯 눈이 충혈되고 입술이 떨린다. 깊은 최면 상태에 돌입한 듯 현은 무수한 언어를 쏟아 낸다. 봄꽃처럼 날리는 옷자락 사이로 현은 절정을 넘어 신령의 세계로 훨훨 날아가고 있다.

 

 



 

 

출처 : 신현식의 수필세상
글쓴이 : 에세이 맨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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