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심
차를 마신다. 찻잔 속에 오롯이 보이는 무수한 금이 있다. 빈 잔에는 알 수가 없었던 것이 찻물을 우려내자 실금이 파르르 돋았다. 무언가 내게 말을 걸고 싶은 듯이 보이기도 하고 할머니의 옛날이야기처럼 졸리게도 보였다. 실금들을 찬찬히 살펴보면 녹차 밭을 천천히 걷는 느낌이 든다. 거기엔 새들의 재잘거림도 아낙들의 수런거림도 들리는 듯하다. 차심이란 가마 속에서 흙과 유약이 다툴 때 생기는 금을 말한다. 뜨거운 찻물이 들어가면서 더 단단하게 그릇을 만들어준다. 불가마속의 뜨거움과 고뇌를 다스려 진한 차의 맛이 우러나오는 것이다. 처음엔 찻잔이 깨어진 건가 잘못 만들어진 건가 의심도 했지만 으레 금이 있다고 했다.
남편의 믿었던 선배에게 뒤통수 맡던 일, 매일 만나 수다 떨던 친구는 이사 가는 날까지도 숨기고 야반도주 했던 사건. 다양한 방식이 존재하는 삶이다. 여러 가지 일을 겪으면서 내 삶의 차심도 하나씩 만들어졌다.
(학창시절)
스무 살 넘어서는 낮엔 직장을 다니고 밤엔 학교를 다녔다. 친구가 군대에서 병이 발발하여 제대하고 복학하기 전 가스배달을 했다. 낮에 대학교 근처에 배달을 갔는데 학생들이 가을을 즐기는 것을 보고 내 생각이 났다며 밤에 찾아왔다. 낮엔 직장일로 밤엔 공부로 젊음을 제대로 즐기지 못하는 내가 떠올랐다며. 그런 친구가 학교를 졸업하고는 뭐가 그리 급한지 날개를 달고 하늘나라로 올라가버렸다. 내겐 차심이 하나 그어졌다.
결혼하고 아이들이 아직 초등학교도 입학하지 않았을 때 집안일에 아이들 양육에 직장 일에 시댁 일까지 겹쳐 나 혼자는 몸이 모자랄 지경이었다. 남편은 늘 직장일이나 친구들 일이 가정보다 더 급하던 시절이었다. 어느 날 몸에 마비가 왔다. 오른쪽을 사용할 수 없었다. 자동차 운전도 왼쪽으로만 했다. 천천히 조심스럽게 초보운전처럼 했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 몸은 조금씩 회복되었다. 몸이 말을 안 듣고 혼자서만 안으로 안으로 삼켜야 할 때 깊은 차심은 생겼다.
한밤중 아이가 열이 펄펄 끓고 깊은 기침을 했다. 남편은 집보다 바깥이 더 좋은지, 아이보다 친구가 더 소중했던지 오질 않고 혼자 병원 응급실로 향했다. 아이는 바로 입원을 하고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남편은 병원을 찾지 않았다. 내 마음엔 이미 차심이 하나 둘 드러났다.
사람을 만나 관계를 할 때 이유 없이 격한 말을 하게 되고 공격적으로 변하는 나를 보며 생소했다. 나 자신도 모르는 나가 이미 안에서 크게 자리매김했다. 사는 건 별거 아냐. 그냥 잠깐이면 되. 고통의 순간은 금방 사라질거야. 마음을 먹어도 쉬이 나쁜 감정들은 사그라질 줄을 몰랐다. 아이들을 버려두고 산으로 들어가 버릴까, 다 포기하고 혼자 여행이라도 다녀올까. 이쁜 아이들과 함께 하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다는 걸 깨닫는 건 순간이었다.
그동안 생긴 차심들은 내가 살아가면서 어려운 일들이 생길 때마다 나무의 옹이처럼 더욱더 굳건해졌다. 여름날 연두 빛에서 초록빛으로 나뭇잎들이 변하는 것처럼 생의 차심들은 짙어졌다.
생이 분주하고 여행조차도 사치라고 생각할 즈음 친구가 갑자기 도시락을 싸서 만나자고 한다, 무조건 그날은 비워두라면서. 이른 아침 친구의 차에 올라타자 바로 보성 녹차 밭으로 향했다. 광고에서만 보던 녹차 밭을 눈으로 보는 순간 차심은 거기에도 있었다.
한 고랑 한 고랑 잎을 따는 아낙들이 분주하다. 차심은 저렇게도 만들어지는구나. 가만히 멍 때리고 있을 적에도 부지런 떨며 생을 살아갈 때도 자신도 모르는 사이 생긴다. 멀찍이 서서 보는 연둣빛의 녹차 밭은 생기 있고 활기차 보였다. 찻잎을 따낸 아낙들이 사라지고 우리는 그 속을 걸어보았다. 잎은 반만 뜯겨진 것도 있고 가지가 부러진 것도 있었다. 가까이 가면 멀리서 보이지 않던 모습까지도 보인다.
나만 힘들다고 엄살을 부렸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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