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결심 / 김경미
라일락이나 은행나무보다 높은 데서 살지 않겠다
이른 저녁에 나온 별빛보다 많은 등을 켜지 않겠다
두 개의 귀와 구두와 여행가방을 언제고 열어두겠다
밤하늘에 노랗게 불 켜진 상현달을
신호등으로 알고 급히 횡단보도를 건넜으되
다치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티끌 같은 월요일들에
창틀 먼지에 다치거나
내 어금니에 내 혀 물리는 일이 더 많았다
함부로 상처받지 않겠다
내 목에 적힌 목차들
재미없다 해도 크게 서운해하지 않겠다
한계가 있겠지만 담벼락 위를 걷다 멈춰서는
갈색 고양이와 친하듯이
비관 없는 애정의 습관을 닮아보겠다
- <현대시> 2010년 7월호 / 시집 『밤의 입국 심사』(문학과지성사, 2014)
* 김경미 : 시인, 방송작가. 1959년 경기도 부천 출생. 한양대학교 사학과 졸업. 198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작품활동 시작. 시집으로 『쓰다 만 편지인들 다시 못 쓰랴』『이기적인 슬픔들을 위하여』『쉿, 나의 세컨드』『고통을 달래는 순서』 『밤의 입국 심사』 외에 에세이집 다수가 있다. 현재 MBC 라디오 방송국 스크립터로 근무하고 있다.
마음을 굳게 정하다, 봄날의 결심. 요즈음 무엇을 하기로 결심하셨는지요. 하지 않기로 결심하셨는지요. 누군가는 꽃과 나무보다 높은 곳에 살고, 누군가는 꽃과 나무와 눈을 마주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여행용 트렁크가 서재일 때, 주인의 모든 발자국은 살아있는 문장이 되겠지요. 그러한 트렁크라면 지구 끝까지 함께 할 수 있지 않을까요. 문득 지구 끝에서 만나고 싶은 한 사람의 이름을 떠올려 봅니다. 삶은 숭고한 그 무엇, 일상이 모여 일생이 된다는 말. 그 무거운 말 앞에서도 때로 하루하루가 티끌 같아 보이기도 하지요. 그럼에도 티끌이 우주를 품는 이치 너머의 이치. 다정이 병(病)이어서 상처를 받고, 서운함을 느끼고 결국 고단함이 속눈썹 그늘 아래 쌓이기도 합니다. 두보는 꽃잎 한 점 떨어져도 봄빛은 줄어든다고 말했지요. 당신의 발자국이 저만치 오고 가는 봄날…. 결심과 실행 사이, 문장과 행간 사이 가만히 불러보는 이름. 애정의 습관이여 안녕, 안녕.
이은규 시인
인간의 난관과 불행은 땅에서 벗어나 라일락이나 은행나무보다 더 높은 곳에서 살고, 초저녁 별들보다 더 많은 등을 켜는 것에서 시작되었을지도 모른다. 건물들이 높아졌다고 인류의 꿈이 더 높아졌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고, 백열등이 발명된 뒤 인류 평균 수면시간은 한 시간이나 줄었다 한다. 수단은 진보했으나 목표는 한 뼘도 더 높아지지 못한 탓이다. 더 많이 일하고 더 많은 물건들을 사들이고 더 큰 집에 살아도 기쁨과 보람이 늘지는 않는다. “제 발목보다 가는 담벼락 위를 걷는” 갈색 고양이들아, 벌이가 시원치 않고, 누추한 집에 산다고, 삶이 밋밋하다고 상처받지 말라. 더 행복해지고 싶다면, 나날의 삶에 자족하고 범사에 기뻐하며 웃어라. 웃고 노래하고 춤추라! 행복해서 노래하고 춤추는 것이 아니라 노래하고 춤추기 때문에 행복해지는 것이다.
장석주 시인
한때 시인의 욕망은 은행나무보다 높은 곳을 향하고 별빛보다 많은 등을 켰겠지요. 그러나 삶은 그 욕망을 끊임없이 좌절시켜서 진실하게 열심히 살수록 상처받고 손해 본다는 걸 인정하게 했겠지요. 이 시를 쓰게 한 힘은 바로 이러한 상처에 대한 분노와 오기 아니었을까요?
그러므로 ‘오늘의 결심’은 삶을 붙들고 아등바등 사느라 헛된 힘을 쓰지 않겠다는 것. 계산적으로 눈치 보면서 처세하여 삶이 주는 상처를 영리하게 피하겠다는 것. 이를테면 고양이처럼 “비관 없는 애정의 습관”을 닮아보겠다는 것. 진지하고 열정적인 사랑은 쓸데없이 마음만 아프게 하는 순진한 태도이므로.
※ 주의 : 이 시를 읽을 땐 반어에 유의할 것. 이 시의 반성문 말투는 진실을 억압하고 얄팍한 계산을 부추기는 삶에 대한 비아냥거림과 조롱이므로. 나약한 개인으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심술궂고 힘센 삶을 웃음거리로 만들어 한바탕 놀겠다는 심보이므로.
김기택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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