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거기 나지막한 돌 하나라도 있다면 / 심보선

지성준 2013. 1. 25. 16:37

거기 나지막한 돌 하나라도 있다면

2011120일 용산 참사 2주기에 부쳐

 

지금 그곳엔 아무것도 없네

원래 아무것도 없었다는 듯이

아무것도 없네

그곳은 텅 비었고

인적 없는 평지가 되었고

저녁 일곱 시 예배를 올릴 때에

건물 옥상에 야곱의 사다리를 희미하게 내려주던 달빛은

이제 구차하게 땅바닥에 엎드려

값비싼 자동차들의 광택을 돋보이게 할 뿐

오늘 그곳에 아무것도 없음이 우리를 경악하게 하네

 

거기 나지막한 돌 하나라도 있다면

우리는 그 위에 앉아 되돌아볼 텐데

무너진 빌딩 한 층 한 층

깨진 유리창 한 장 한 장

부서진 타일 한 조각 한 조각

불길에 검게 그을리고 피와 살점이 묻은

학살의 증거들

학살 이후의 나날들

탄원들, 기도들, 투쟁들을

 

거기 나지막한 돌 하나라도 있다면

우리는 그 위에 앉아 이야기할 텐데

야구와 낚시에 얽힌 소싯적 추억

늙은 가슴팍을 때리던 성경 구절

수많은 인내와 소박한 꿈들

그러다 우리가 어찌어찌 용산에 흘러오게 됐는지

그러나 더 이상 어찌어찌 끌려다니지 않겠다

이번만은 싸워보겠다 이겨보겠다

그날 불현 듯 하나의 영혼을 넘쳐

다른 영혼으로 흘러간 무모한 책임감에 대하여

 

거기 나지막한 돌 하나라도 있다면

우리는 그 위에 앉아 서로에게 물어볼 텐데

학살자들은 또 무슨 궁리를 할까?

우리가 울부짖기도 전에 우리의 목을 죈 그들

우리가 죽기도 전에 우리의 관을 짠 그들

그런데 우리가 무죄를 입증하기도 전에

차가운 곁눈질을 던지며 그곳을 총총히 지나치던

시민이라는 이름의 방관자들은

도대체 어디로 갔을까?

 

하지만 거기 나지막한 돌 하나라도 있다면

우리는 그 위에 앉아 있기만 하지는 않겠네

우리는 그 위에 일어서서 말하겠네

이제 인간이란 너 나 할 것 없이

하나하나 불붙은 망루가 되었다

생존의 가파른 꼭대기에 매달려

쓰레기와 잿더미 사이에 흔들리며

여기 사람이 있다!

여기 사람이 있단 말이다!

절규하지 않으면 안 되는 존재가 되었다고

 

거기 나지막한 돌 하나라도 있다면

우리는 그 위에 서서 머리를 맞대고 따져볼 텐데

불운을 향해 녹슨 철사처럼 구부러지는 운명

불행을 향해 작은 자갈처럼 굴러가는 인생

모든 것의 원인과 뿌리에 골몰할 텐데

그러다 도저히 답을 찾을 수 없을 때에

무식한 우리는 외치겠지

어쨌든 이대로 이렇게 살 수만은 없지 않은가!

선량한 우리는 호소하겠지

원치 않는 증오심을 갖는다는 건 얼마나 고통스러운가!

 

거기 나지막한 돌 하나라도 있다면

우리는 최선을 다해 최대한 많은 영혼을

그 위로 데리고 올 텐데

언제나 배고팠던 입

먹기에 급급했던 입

그 남루했던 입술들이 층층이 쌓여

높디높은 메아리의 첨탑을 일으켜 세우면

말 못 하고 외면했던 진실을

목구멍에서 소용돌이치며 솟구치는 진실을

우리는 말하기 시작하리

그리하여 거기 나지막한 돌 위에 선다면

오로지 희망, 희망에 대해서만 말하기로

산 자와 죽은 자

기쁜 자와 슬픈 자

선한 자와 악한 자

모두 다 똑같은 결심을 하게 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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