괄시당하는 서러운 노년, 전통사회라고 달랐을까
한겨레2012.10.12 21:42

[한겨레]'근대화 이후 노인 소외' 통념 깨
팻 테인 엮음, 슐람미스 샤하르 외 6인 지음, 안병직 옮김/글항아리·2만8000원
"모든 이에게 노년은 하나의 유형만 있는 것은 아니다."
1세기 로마의 철학자 세네카가 남긴 짧은 논평은 '노년'이 개인의 체질, 취향, 계층, 시대상 등에 따라 주관적으로 해석될 수밖에 없음을 함축한다. 노령화시대에도, '팔십청춘', '원로 삼팔육'이 있듯이 말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젊은 몸만 떠받들며, 나이 든 삶에는 여전히 고개를 돌리기 일쑤다.
팻 테인 영국 런던대 교수 등 영미권 역사학자 7명이 함께 쓴 <노년의 역사>는 우리가 몰랐던 늙음에 대한 시선의 사회문화사를 들춰낸다. 노인 소외와 고독, 궁핍은 근대화 이후 두드러진 현상이라는 통념을 깨는 사료와 사실들이 신선하다. 노인의 메마른 육체와 기질에 대한 경멸·배제의 역사는 기원전부터 유구했으며, 노년에 대한 가치관들도 종잡기 어려울 정도로 다양한 양상을 띤다는 논지다. 고대 그리스·로마부터 중세·르네상스, 17~20세기 근대기까지 노년의 삶과 인식에 대한 변천을 다룬 7개 장은 시종 두 가지 시선으로 풀려간다. '노인들은 가정 사회에서 어떤 대접을 받았나'와 '늙음의 의미·가치를 어떻게 보았는가'다. 이 두 시선을 노년을 언급한 고금의 의학·문학·철학·종교 저술과 설화·속담 등 각양각색 사료들에 비춰보니 그 역사는 욕망처럼 딱 부러지게 집기 어려운 '다양성' 자체였다는 게 핵심이다.
단적으로, 노년의 시작에 대한 연령 기준은 과거나 지금이나 50~70살로 큰 차이가 없었다. 근대화 이전에도 사망률이 높은 생후 몇년을 넘겼다면 60살 이상 생존 가능성은 높았다. 1세기 로마 인구의 약 6~8%는 60살을 넘었다고 추정된다. 14세기 초 영어본 <구약> 시편에는 '우리 삶의 나날은 70년'이라는 글귀도 보인다. 중세인들도 지금처럼 용모나 몸 상태에 대한 주관적 잣대로 노인을 가늠했던 게 분명하다. 12세기 학자 마이모니데스의 문답에서, "누가 늙은 여성인가"란 질문에 나온 대답은 "늙었다고 해도 항의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옛적 노인들은 권위와 존경을 누리지 않았을까. 그것도 선입관이라고 한다. 고대 그리스·로마는 핵가족 사회로, 노인들은 노후 자금 벌기에 열심이었고, 로마인들은 묘비명에 이를 업적처럼 새기기도 했다. 중세 이후로도 셰익스피어 <리어왕>처럼, 생전 자식에 재산을 넘기는 부담감과 얹혀사는 굴욕 등을 묘사한 속담과 문학작품들이 넘친다. 공방·관청·수도원 등에서 '노령자의 권능'은 별로 존재하지 않았다. 과거에도 노인의 권위는 개인 능력과 지속적 성취로만 유지됐다고 책에선 지적한다.
종교 영역을 제외하면, 노인들은 고대 이래 어린이·여성과 함께 주변적인 구성원에 머물렀다. 특히 폐경기 지난 여성들은 더욱 냉대받으며 이중으로 주변화되는 처지였다. 17세기 이탈리아 전통극 '코메디아 델라르테'에서 우둔한 색광으로 등장해 조롱거리가 되는 늙은 남성 배역 '판탈롱'이나 늙은 여성을 모델로 삼은 그리스 신화의 세 자매 괴물 '그라이아이'는 그 단적인 사례들로 거론된다.
18세기 근대 정치혁명이 일어나자, 노인들은 내세 아닌 현실을 보고 사회적 존재 가치를 발현하려는 '세속화'의 길로 접어든다. 일기·자서전 쓰기 유행이나 손주들을 돌보는 보육자상 등이 이런 배경에서 나타났다. 19세기 산업화에 따른 생산력 증대로 물질적 안락 속에 은퇴할 가능성이 열렸고, 20세기 이후 노년은 정상적 삶으로 인정받으면서, 의미의 다양성이 어느 때보다 확장됐다. 안병직 서울대 교수는 옮긴이 서문에서 노인의 범주나 노년의 시점은 역사적으로 가변적이었고, 전통사회에서도 노인들은 노후에 가능한 한 스스로 삶을 꾸리는 '자립'의 규범과 이상을 추구해왔다고 썼는데, 바로 이 대목이 책의 결론처럼 읽힌다. 명저 <노년에 관하여>를 쓴 로마 철인 키케로의 말은 이런 맥락에서 시대를 초월한 금언일 것이다. "노년에는 스스로 싸우고, 권리를 지키며, 누구든 의지하려 하지 않고, 마지막 숨을 거두기까지 스스로를 통제하려 할 때만 존중받을 것이다."
노형석 기자nug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