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바람의 본적 / 유명순

지성준 2018. 10. 30. 16:25

바람의 신경은 온통 깃발에 쏠려 있다
모든 걸 흔들어 놓아야 직성이 풀리는
바람의 입이 물고 흔들어대는 저 초록의 산
바람에 제 몸을 맡기는 날개들이 있다
벼랑 끝에 서서 암 덩어리처럼 뭉쳐진 소나무를 보았다
전신에 바늘이 박힌 채 하늘 향해 흔들리고 있었다
몇 만 번의 흔들림으로 나이가 먹었을 그 소나무
수많은 바늘을 꽂고 호젓이 저물어 갔다
바람의 본적을 묻고 싶다
내가 모르는 어느 별에다 호적을 두고 온 것인지
히말라야 보다 몇 배의 습곡이 되었을 바람의 역사
나의 날은 늘 흔들림의 날들이었다
낮 달처럼 그림자도 없이
그렇게 바람을 따라가고 있었다
망치도 없이 등이 휜 여자의 늙은 뼈에
수 천 개의 구멍을 뚫은 바람
나도 오래된 무처럼 바람이 들기 시작했다
본적이 어디인지도 모를 그 바람을 쫓아
어석어석 살아가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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