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기억의 자리 / 나희덕

지성준 2018. 3. 30. 20:15

 

 

기억의 자리

나희덕

 

어렵게 멀어져간 것들이

다시 돌아올까봐

나는 등을 돌리고 걷는다

추억의 속도보다는 빨리 걸어야 한다

이제 보여줄 수 있는 건

뒷모습뿐, 눈부신 것도

등에 쏟아지는 햇살뿐일 것이니

도망치는 동안에만 아름다울 수 있는

길의 어귀마다 여름꽃들이 피어난다

키를 달리하여

수많은 내 몸들이 피었다 진다

시든 꽃잎이 그만

피어나는 꽃잎 위로 떨어져 내린다

휘청거리지 않으려고 걷는다, 빨리

기억의 자리마다

발이 멈추어선 줄도 모르고

예전의 그 자리로 돌아온 줄도 모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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