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성준 2012. 4. 6. 08:50

어떤날 '그날' (1986)
어떤 날 불어온 투명한 바람

요즘은 소비자가 무엇을 살지 사업자가 더 잘 안다. 소비자들의 마음을 잘 이해한다는 것이 아니라 대형 사업자가 정해주는 상품을 대부분의 소비자가 사게 되는 현실을 빗댄 말이다. 문화상품도 마찬가지고, 음악의 경우에도 그러하다. 주류 사업자들은 음악인들에게 TV출연자격이나 CF출연료를 주는 대신에 예술가 본연의 취향과 자존을 자신에게 팔라고 주문한다. 그런 이들은 세련된 사무실에서 상품이 될 음악인에게 선물할 사슬을 꿰고 있다. 여기에 이러한 생산•유통의 구조에서는 나오기 힘들고, 설령 만들어진다 해도 다수 대중에게 전달되기 힘들어진 음악에 관하여 적고자 한다.

“언제인지 난 모르지
하지만 다가오는 그날엔
그 새로운 바람이 불어올 거야
이 거리 위에“

1985년에서 1989년 사이에 대중음악은 대단히 이례적인 성과를 거두고 있었다. 완전히 별개인 노래들마저 서로 공유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1986년, 청년 조동익과 이제 막 청년이 된 이병우는 예언처럼 노래했다. ‘따로 또 같이’와 ‘들국화’와 함께 한국 대중음악사의 전환점을 마련한 어떤날은 삶을 여린 감성으로 노래했고, 새로운 작법과 세션, 그리고 녹음으로 8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우리 음악의 르네상스를 열게 된다. 게다가 그들은 당시에 26세(조동익)와 21세(이병우)에 불과했다. 어쩌면 어릴 적 작품에 숨겨진 어설픔과 치기를 누구보다 잘 아는 당사자들은 조금은 아쉬워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음악을 듣는 이들은 바로 그렇기에 더욱 사랑했다. 어떤 면에선 음악을 하는 이보다 음악을 듣는 이가 음악을 더 잘 알기도 한다. 아니, 잘 알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너무 아쉬워 하지마’라고 노래했으니.

나라별로 다른 언어에 따라 발성 시에 사용하는 사람들의 구강부위가 다르다. 하물며 다른 음악을 듣고 다른 환경에서 다른 감수성과 다른 생각을 키워온 이들은 어떠했을까. 어떤날은 자신들에게 맞는 언어를 자신들의 발성기관에 맞추어 부르고 연주했다. ‘하늘’과 ‘오래된 친구’의 고즈넉한 여유와 ‘오후만 있던 일요일’과 ‘너무 아쉬워 하지마’ 그리고 ‘겨울하루’의 낮게 엎드린 쓸쓸함은 그 이전과 같은 단어이면서도 전혀 다른 발성의 언어였다. 심지어 전문 보컬리스트가 아닌 사람들이 부르는 노래마저 신선했다. 그 이후 오랫동안 들어오고 있음에도 이 노래들은 좋은 음악은 들을수록 좋게 들린다는 사실을 지금도 증명하고 있다. 대개 음악은 조금 지나면 시대에 뒤떨어진 것처럼 보이지만 더 지나면 시대를 반영한 것이 된다. 여기에 어떤날의 음악은 지금도 공감이 가능한 현재성까지 지녔다.

어떤날의 데뷔앨범을 관통하는 것은 투명함이다. ‘그날’도 그렇다. 그런데 다른 곡들이 포크와 재즈의 뉘앙스를 안고 있다면, ‘그날’은 프로그레시브 록을 자연스럽게 품었다. 후반부의 일렉트릭 기타 연주는 당시로선 상당히 긴 독주였고, 퓨전 재즈와 포크보다 록에 더 많은 영향을 받은 예비 음악인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몇 해 후에 발표된 시인과 촌장의 ‘새날’에는 비관의 그림자가 드리워 있었다면, ‘그날’에는 희망이 움트고 있었다. 그렇게 불안을 바람에 씻어냈다. 그래서 어떤날의 노래들과 ‘그날’은 새로운 대중음악의 첫 단추였다. 새로운 감수성과 기법을 지닌 세대의 출현이었으며, 세대교체로 이어지는 터미널이었던 것이다. 더 멀리는 10년 후에 성장할 인디음악과도 포물선 모양의 연결선으로 이어졌다. 아마 누군가에게는 겨울나무에서 자라는 겨우살이를 고대 유럽의 켈트족 또한 약재로 사용했다는 기록을 접할 때의 반가움 이상이었을 것이다.

앨범명
1집 1960.1965
아티스트 및 발매일
어떤날 | 1986.12.10
타이틀곡
오래된 친구
앨범설명

조동익과 이병우로 이루어진 듀오로 1980년대 단 두 장의 앨범을 낸 바 있는 어떤 날이 1986년 발표한 첫 번째 앨범으로, 이들은 이미 본 앨범 발매 전인 1984년 [우리 노래 전시회 1]에서 '너무 아쉬워 하지마'를 발표하며 데뷔하였다. 본 앨범을 ..

또 다른 의의를 음악적 지분을 두 구성원이 공평히 나눈 듀오의 합작품이라는 ‘그날’의 탄생 과정에서 찾을 수 있다. 조동익이 작사•작곡한 ‘그날’ 역시 이병우의 기타 연주로 더 중요한 곡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례가 갈수록 귀해지고 있다. 왜일까. 극단적으로 요즘처럼 기획된 유닛이 활보하는 시절에는 더욱 그렇다. 당장 시장의 반응을 얻기 위한 목적이나 남녀 팬들 모두에게 어필하려는 남녀 커플 유닛, 식상하지 않은가. 꽤 괜찮은 솔로 데뷔작을 발표한 가인과 소녀시대 멤버들 중에서 싱어로서의 개성과 가능성이 보이는 제시카가 좋은 작곡가들을 만나기만 한다면 당장은 아니더라도 훗날 재평가 받을만한 노래를 남길지도 모르겠다. 물론 농담반 진담반이다. 어떤날과 ‘그날’은 더 좋은 음악을 위한 기획이 스스로에게 발목을 잡힐 경우에 잃어버릴 수밖에 없는 가능성을 상징한다.

2집 이후 어떤날의 세 번째 앨범을 본 사람은 없다. 이병우는 기타연주자 겸 영화음악가로, 조동익은 여러 음악인들을 작가의 반열에 올려놓은 유능한 프로듀서이자 탁월한 세션 연주인으로 성공한다. 특히 조동익은 1990년대에 안치환과 김광석 그리고 장필순의 음반에서 음악감독의 역량을 보여줬을 뿐만 아니라 여러 영화의 음악작업도 하였으며, 동시에 후배들을 발굴하는 음반을 제작하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설명은 부차적일 수 있다. 이미 그 날에 증명했듯이 음악성보다 중요한 경력은 없다.

세상에는 엉뚱한 운명을 갖게 된 이름들이 있다. 장 니코는 자신의 이름에서 나온 니코틴이란 단어가 한때 새로운 풍습의 대명사였다가 더 나중에는 위험물질로 취급받게 될 줄 몰랐을 것이다. 태평양의 어느 아름다운 섬은 핵 실험의 무대로 자신을 희생한 대가로 여성들의 신체 ‘일부’를 가리는 비키니로 기억될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무수히 많은 어떤 날은 훌륭한 음악인들이 자신의 흔한 이름을 사용해준 것에 감사하고 있을지 모른다. 덕분에 모든 어떤 날은 특별해졌고, ‘그날’은 모두에게 기억될 수 있었다. 음악인의 가능성이 존중받을 수 있었던 시절과 환경에서 나올 수 있었고, 또 알려질 수 있었던 과거의 ‘그날’은 망각 자체로부터 스스로를 구해냈다.

세상을 바꾼 노래 소개

타이틀이 거창하다고 느낄지도 모르겠다. 원자폭탄으로 도시 하나를 순식간에 박살내버리거나 멀쩡한 강바닥을 파내서 생태계를 초토화시키는 정도쯤이나 되야 세상을 바꿨다고 얘기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을 설득할 생각은 없다. 다만, 노래가 세상을 바꾸는 방식은 투표의 작동원리와 비슷하다는 것을 얘기하고 싶을 뿐이다. 한 장의 투표권이 공동의 지향과 만남으로써 세상을 (좋게든 나쁘게든) 바꾸는 동력으로 작용하는 것처럼, 하나의 노래는 대중의 정서와 호응함으로써 한 시대의 사회와 문화를 규정하는 이정표로 우뚝 서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렇게 '세상을 바꾼 노래'들을 주목했다. 당초 1900년대 초반부터 시작하여 20세기 전체를 아우르는 기획으로 준비했으나, 여러 가지 현실적인 여건의 제약으로 여기서는 1970년 이후 발표된 노래들을 시대순으로 소개하기로 했다는 점도 밝혀둔다. 더불어, 여기에 미처 소개하지 못하는 노래들은 언젠가 다른 방식으로 독자 여러분을 찾을 것이라는 약속도 함께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