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쉬운 이야기

이문세*이영훈

지성준 2012. 4. 6. 08:48

이문세 '그녀의 웃음소리뿐 (1986)

세상 여기저기에 숨겨진 보물들은 대체로 찾는 노고에 비하면 그다지 가치가 없어 보이기 마련이다. 여기 예외가 있다. ‘그녀의 웃음소리뿐’을 글로 풀기에 앞서 고백과 간증이 필요할 것 같다.

먼저 고백이다. 그동안 이문세•이영훈에 관하여 참 많은 글을 썼다. 갖고 있는 손가락들로는 꼽아내기 힘들고, 그 중 하나를 『결국, 음악』이란 책에 넣었다. 아무래도 반복된 표현을 피할 수 없을 것 같아 양해를 구하고자 한다. 다음은 간증이다. 고(故) 이영훈의 유고를 모은 『광화문 연가』에 실린 추천사를 쓸 때가 떠오른다. 이문세의 3집부터 7집까지 다섯 장의 음반에 실린 노래 전곡을 외워 부르고, 학교 앞 서점에서 참고서에 끼워주던 ‘코팅 책갈피’를 한 다발 모아 벽 위에 이름을 만들어 붙여놓을 정도였다. 나이 들어가면서도 저녁이 밤을 받아들이는 골목에서 건전지를 아끼려 카세트테이프에 연필을 끼워 돌리면서 ‘소녀’를 불렀고, 차창을 열어도 바람이 들지 않는 도로에서 ‘그녀의 웃음소리뿐’을 들었으며, 담배 타들어 가는 소리마저 들리던 눈 내리는 새벽에 ‘옛사랑’을 흥얼거리곤 옷깃을 여몄다. 어느덧 음악평론을 하는 이가 된 소년이 그의 부음을 듣고, 유고집에 실릴 글을 쓰게 되었을 때의 심정을 제대로 설명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이문세와 이영훈의 만남은 [이문세 3](1985)부터다. 히트송인 ‘난 아직 모르잖아요’와 클래식이 된 ‘소녀’와 ‘빗속에서’, 음악극 스타일의 ‘할 말을 하지 못했죠’ 그리고 1970년대 하드 록의 영향을 수렴한 ‘휘파람’까지 이영훈의 곡들은 모두 인상 깊었다. 하지만 시작에 불과했다. 이영훈이 모든 곡을 맡고 당대 최고의 연주인들과 오케스트라를 동원한 팝 앨범이 탄생한다. [이문세 4](1987)이다. 이문세•이영훈•김명곤의 합작품으로 화성의 안정성을 중시하며 대중성과 품격을 함께 유지하는 대중음악의 조형방식을 제시했다. 일관된 흐름과 다양성을 공유하는 앨범을 지향하여 웰-메이드의 교과서를 완성했고, 가수만큼이나 작곡가가 주목받는 풍토를 재현했으며, 대중성과 예술성을 겸한 앨범이 상업적 성과까지 얻어냈다. 그들에 의하여 대중성과 음악성은 ‘의미 있는 대중성’이라는 이름으로 이미 화해했다. 대중가요의 승격을 이영훈 혼자 이루진 않았지만, 그가 없었다면 완성되지 않았을 것이다. 무엇보다 격이 있는 사랑노래가 얼마나 예술적이고 보편적일 수 있는지 증명했다. 그를 잊는 것은 이 세상의 사랑 노래가 모두 사라진 후에나 가능할 것이다.

수록곡 모두가 훌륭한 [이문세 4]를 ‘그녀의 웃음소리뿐’이 대표하게 된 것은 (‘어허야 둥기둥기’를 제외하면) 음반의 맨 마지막에서 당시로선 상당한 시간인 6분 40초에 달하는 대곡이고, 발표 후 수년이 지나서도 라디오 순위의 상위권을 유지했기 때문이 아니다. 음악적으로 완벽했기 때문이다. 포크와 팝, 클래식과 재즈를 수렴한 발라드를 완성하는 가운데에서도 록을 대동한 가요-팝인 ‘그녀의 웃음소리뿐’은 편곡과 악기 편성, 곡의 진행과 연주, 리드보컬과 코러스 그리고 스캣에 이르기까지 전체가 구조적 완결성을 지녔다. [이문세 3]의 ‘휘파람’의 발전형으로서 [이문세 6](1989)의 ‘다시 만나리’로 재시도 되는 구조이지만, 재현되진 않았다. 또한 록 기타 연주와 피아노가 함께 서정을 만들고(무명 시절 이영훈에게 피아노를 선물한 어머니는 그가 유명해지기 전에 세상을 떠났다), 누군가의 옷자락이 쓸며 지나간 흔적을 배채법으로 남겨 놓았을 뿐이다. 25년, 한 세대가 지났다. 지금도 ‘그녀의 웃음소리뿐’이 완벽한 곡이라는 생각엔 변함없고, 25년 전과 지금의 감상 그리고 감정은 놀랍도록 일치한다. 과거로의 여행을 허가받는다면 기꺼이 경비를 지불할 여행자의 손에 쥐어진 차표이자 음악의 동시성에 대한 확답이다.

앨범명
4집 이문세 4 (Ver.1)
아티스트 및 발매일
이문세 | 1987.03.10
타이틀곡
사랑이 지나가면
앨범설명

1987년, 칙칙한 분위기의 이문세 4집 초판이 제작되었다. 제작사는 공전의 히트를 예감하고 발 빠르게 뮤지션 정보를 보강하고 독특한 모자이크 분위기로 이문세 사진을 감각적으로 디자인한 재발매 음반을 제작했다. 대박으로 이어진 4집 앨범은 ..

이러저러한 리메이크가 범람하는 풍토 속에 이문세•이영훈의 곡들도 그 저주를 벗어나진 못했다(가창력 과시 위주의 버전을 들을 때마다 이문세의 가창이 얼마나 적절했는지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가치 있는 버전이 하나 있다. 1996년 무렵부터 활동을 시작한 로튼 애플(Rotten Apple)이 [Indie Power 2001]에 참여했을 때의 ‘그녀의 웃음소리뿐’이다. 한국 노래들을 인디/언더 밴드들이 다시 만듦으로써 청자 층을 확장하려 했던 ‘인디파워’ 시리즈에 음악적 의의를 부여해볼 때 가장 훌륭한 사례는 선곡과 인상 깊은 재탄생에 성공한 로튼 애플의 ‘그녀의 웃음소리뿐’이다. 이 버전은 이문세•이영훈의 곡들을 리메이크한 것들뿐만 아니라 한국 가요 리메이크 전반에서도 최고 수준으로 기록될 자격이 충분하다. 그마저 11년 전이다. 그 곡을 다시 들으며 요즘 서바이벌 프로그램들을 떠올려보니 이런 말이 한탄처럼 새어 나온다. “이것이 퇴화가 아니면 도대체 무어란 말인가!”

2008년 2월 14일, 이영훈도 과거가 되었다. 새삼스럽지 않은 일이다. 둘러보면 온통 죽은 자들의 음악이다. 하지만 “어떤 의미도 어떤 미소도 세월이 흩어 가는 걸”이라던 노래는 세월에 흩어지지 않았다.

세상을 바꾼 노래 소개

타이틀이 거창하다고 느낄지도 모르겠다. 원자폭탄으로 도시 하나를 순식간에 박살내버리거나 멀쩡한 강바닥을 파내서 생태계를 초토화시키는 정도쯤이나 되야 세상을 바꿨다고 얘기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을 설득할 생각은 없다. 다만, 노래가 세상을 바꾸는 방식은 투표의 작동원리와 비슷하다는 것을 얘기하고 싶을 뿐이다. 한 장의 투표권이 공동의 지향과 만남으로써 세상을 (좋게든 나쁘게든) 바꾸는 동력으로 작용하는 것처럼, 하나의 노래는 대중의 정서와 호응함으로써 한 시대의 사회와 문화를 규정하는 이정표로 우뚝 서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렇게 '세상을 바꾼 노래'들을 주목했다. 당초 1900년대 초반부터 시작하여 20세기 전체를 아우르는 기획으로 준비했으나, 여러 가지 현실적인 여건의 제약으로 여기서는 1970년 이후 발표된 노래들을 시대순으로 소개하기로 했다는 점도 밝혀둔다. 더불어, 여기에 미처 소개하지 못하는 노래들은 언젠가 다른 방식으로 독자 여러분을 찾을 것이라는 약속도 함께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