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학

뭉크

지성준 2010. 4. 20. 12:19

뭉크  (Edvard Munch , 1863~1944 )

 

뭉크는 1863년 노르웨이의 의사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군의관이던 아버지는 이상 성격소유자이고  

그가 다섯 살 되던 해 어머니가 동생 잉게르를 낳고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나게 되자 집안은 불행을 맞게 된다.

어머니대신 가정을 맡아 돌보던 누이 소피에도 뭉크 나이 14세(1877년) 때 결핵으로 죽는다.

1895년, 또 다른 여동생 로이라는 우울증으로 정신병원에 입원하지만 얼마후 생을 마감한다

(그의 할아버지도 그랬다)

다섯 형제 중 유일하게 안드레아스 만이 결혼했으나 몇 개월 만에 죽고 만다.

뭉크 역시 생애를 두고 건강하지 못했다. 뭉크가 무엇인가에 홀린듯이 삶을 살 수 밖에 없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Self-Portrait with a Burning Cigarette, 1895

 

늘 자기의 주위에는 끊임없는 악의에 찬 위험이 육박하고 있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공포감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생활을 하였다. 그것 때문에 그는 누차  정신분열 증세까지

일으켰다.

이러한 환경과 병약한 육체가 그의 정신과 작품에 크게 영향을 끼쳤다.  1881∼1884년

오슬로미술학교에서 공부한 직후에 그린 유화 《병든 소녀(1885∼86)》에서 볼 수 있는 삶

과 죽음에 대한 응시(凝視)가 그 후 그의 작품을 일관하는 기조가 되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1889년 여름을 해변에서 지내며 신비한 밤의 불안을 묘사한 《별 있는 밤》 《백야》 등을 그렸다.

1890년 파리로 가서 일본목판화에 매력을 느꼈고, C. 피사로·H.T. 로트레크·E.H.P. 고갱·V. 고흐에게 매료되었다 .

삶이 절망스러울 때 누구나가 한 번쯤은 죽음을 생각한다. 뭉크는 이 절망과 불안의 삶을

산 화가였다. 하지만 그런 현실 속에서 뭉크는 죽음 대신 그림을 선택했다.

그리고 그 그림을 통해서 인생의 어두운 면을 그려낸 화가였다.

1892년 베를린미술협회전에 초청되어 출품하였는데, 초기의 서정적인 화풍을 더욱 내면화

해 삶과 죽음, 사랑과 관능, 공포와 우수 등을 강렬한 색채로 표출한 그의 화풍은 큰 물의를

자아냈다. 작품으로는 《절규(1893)》를 포함, 《삶의 프리즈》라는 연작(連作)을 완성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The Scream, 1893, National Gallery, Oslo

 

1894년부터 판화를 시작해 회화와 똑같은 모티브를 반복하여 다루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1908∼1909년 신경병을 앓은 후 색채는 밝아지고 문학적·심리적 정감이 점점 뚜렷해졌다.

1937년 나치스는 독일에 있는 그의 작품 일체를 퇴폐예술이라 하여 몰수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Madonna, 1894-95 
 

 

뭉크의 마돈나를 보면 그녀는 더 이상 성스런 마리아의 모습이 아니다.

사랑(eros)과 죽음(thanatos)은 서로 공존하며 동시에 나타나고

여성은 남자뿐만 아니라 자신까지도 위험케 하는 죽음에 지배되는 동물로서

표현되어지고 있다. 마돈나를 통해 세기말의 팜므파탈을 표현한 것이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Spring, 1889,
 
 뭉크가 그린 것 중 최초로 자의식이 드러나는 그림이다.
그의 청년기 작품들에서처럼 뭉크가 직접 체험을 해서 너무나 잘 알고 있던 상황이다.
연약한 환자의 괴로워하는 모습을 실내의 어둠이 에워싸고 있다.
그럼에도 제목은 "봄"이라는 희망적 알레고리를 사용하고 있다.
 

 
 
 

뭉크는 수많은 자화상을 그렸는데 초기에는 엄격한 양식에 낭만적인 우울함에 차 있는 자신을 나타냈으며, 젊었을 때는 자유로운 형태감 추구에서 자의식(自意識)이 넘쳐 나게 표현하였다.

 

뭉크의 예술에 대한 지지와 평가는 만년에 가서 높아지는데, 1912년 쾰른에서 개최된

분리파(分離派) 대전람회에서 세잔, 고흐, 고갱과 더불어 방이 하나씩 배당된 것을 비롯하여 같은 해 뉴욕에서 개최된 현대 스칸디나비아 전람회에도 초대 출품하는 등 국제적 명성을 갖게 되었다.

이 외에도 뉴욕에서 개최된 아몰리쇼에 출품, 1922년에 취리히 미술관, 1927년에는 베를린 국립 미술관에 회고전이 개최되었으며, 1933년 70 세의 생일에는 대작가로서의 유럽 각지로부터 축사를 받았다.

37년 한때는 나치스에 의해 '퇴폐적인 예술' 이란 낙인이 찍히기도 했으나, 격동하는 제 2차 세계 대전의 소용돌이도 아랑곳없이 불굴의 의지로 제작에 몰두함으로써 확실한 예술 경지를 이루었다.

판화가로서, 표현주의 회화의 선구자로서 높이 평가된다.

 

“남자들이 책을 읽고, 여자들이 뜨개질하고 있는 따위의 실내화는 더 이상 그릴 필요가 없다. 내가 그리는 것은 숨을 쉬고, 느끼고, 괴로워하고, 사랑하며, 살아있는 인간이어야 한다.

보는 사람은 이 주제에서 신성함과 숭고함을 이해하게 될 것이며, 교회에서 하는 것처럼 모자를 벗을 것이다.”

----------------------------------------

 

뭉크 Edvard Munch(1863~1944) 의 작품세계

 

 

뭉크는 노르웨이가 낳은 가장 위대한 화가로서 사랑, 고통, 죽음, 불안 등을 주제로 하여 내면 세계를 시각화 하였으며, '영혼의 고백'이라고도 할 수 있는 독창성 있는 작품세계를

통하여 미술사의 흐름에 한 전환점을 제기 하였다.

 

 

불안

뭉크의 분열증 증세는 1890년 도라 라우젠과의 연애로 고민과 알콜에 의해 더욱 심화되어지면서 신경 쇠약 상태가 한때 계속 되어지기도 하는데, 공허한 듯하면서도 무엇의 의미를 찾으려는 기묘한 눈을 크게 뜨고,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검은 옷의 군상(群像)의 표정은 뭉크의 자주 다루어진 주제이기도 하다.  저녁놀을 배경으로 하여 나타난 산과들에서의 곡선적 효과는 불안한 감정을 더욱 강하게 느끼도록 한다.


그랑 카페의 입센

이 작품을 그린 1906년(43세)에 베를린에 서 공연한 입센의 '유령', '헤다 가블러' 를 위한 무대 장치의 밑그림을 제작하였다. 당시 32세이던 1895년 오슬로의 브롬 쿠비스트 화랑에서 개인전이 개최되었는데 이때에 보이콧하려는 사람들에 의해 논란의 대상이 된 후 전시 일주일만에 그만두게 되었다.

 

 

프르치비제우스카의 초상

뭉크는 많은 인물화를 그렸는데, 항시 생존의 의미를 존중하며, 인간을 위한 예술을 창조하였다.

뭉크는 이탈리아 여행 후 독일로 가게 될 기회를 갖게 된다. 1892년 베를린에서 예술적이면서도 문학적인 단체들과의 교제를 통하여 신비주의와 환상적인 경향의 감정을 발표하고 있다. 이 무렵 제작한 것으로 실재적인 인간을 표현하면서도 공간 속에 떠 있는 듯한 인물의 묘사는 탐미적(耽美的)인 세계에 몰입되어지는 내면세계를 느끼게 한다. 



실내

뭉크가 화가가 되기를 지망할 무렵 제작한 소품(小品)이다. 이 그림에서 볼 수 있는 북유럽의 일반 가정의 실내 풍경은 주제에 있어서나 표현 양식에 있어 특유성을 지니고 있다.

 

귀가하는 노동자들

1915년 캔버스 유채 200X228Cm

오슬로 뭉크 미술관 소장

 

소리

본래는 <여름밤의 꿈>이란 제목의 작품으로서 사랑의 연작 중 한 작품이다.  여기서 표현된 여인은 체념한 여인으로서, 고독과 슬픔에 찬 모습으로서의 삶을 갈망하는 상(像)인 것이다. 바다를 배경으로 하여 달기둥이 자주 등장되어지는데, 고독, 불안에 차 있는 여인이 소나무 앞에 우뚝 서 있는 것이 멀리서 보트놀이 하는 남녀의 행복의 소리를 듣고 있는 듯하다.

 

 

빨간 덩굴풀 1900

노르웨이 풍경 중에서도 특히 오슬로 시가와 오스가르 스트란드의 바닷가 풍경에서 뭉크는 정신적인 생명감을 표현하였으며, 자연을 통해 외로운 감정을 불러일으키기보다는 자연 속의 분위기를 찾아냈던 것이다. 이 작품을 제작한 해가 1900년으로서 이 때에는 베를린 화단을 중심으로 활약하였는데 문인과의 교류가 왕성하였으며, 한편 뭉크의 주관성의 강조가 고흐 등과 함께 포비즘이나 표현주의에 많은 영향을 주었음을 알 수 있다.



마을의 큰길

이 작품을 제작하던 시기인 1905년은 뭉크가 주로 독일에서 지낸 때로서, 그의 회화나 판화에서 찾아볼 수 없는 주관성이 강한 그림으로 대상 표현이 특이하다.  눈 이 내린 마을의 광장을 집회가 끝난 뒤인지, 아니면 축제일에 남녀가 기쁨을 나누고 있는 집단 행사인지, 전면에 무리지어 움직이는 오리와 대조적으로 강약의 하모니를 느끼게 한다. 뭉크에게 있어 이러한 화풍은 보기 드문 것으로써 집단이 지니는 힘에 대한 압도력을 호소하기 위한 그림이 아닐는지..


야곱슨 교수의 초상화

뭉크가 45세 되던 해, 오랜 외국 생활의 제작 활동으로 인하여 긴장, 음주 등에 의한 알콜 중독 증세가 보인다. 또 천성이기도 한 내적 갈등, 정서적 어려움, 강박관념 등은 그를 위기로 몰고 가게 된다. 이 작품은 1908년 코펜하겐의 야곱슨 교수로부터 치료를 받게 되고, 병원에 머물며 치료 중에도 제작 활동을 하게 되는 이즈음의 작품이다. 



멱감는 남자들

만년에 뭉크는 건강이 매우 좋지 않은 상태에 이르게 된다. 그 당시 무질서하면서도 거친 생활에 술만 마시고 방황하던 때로, 건강을 되찾기 위해 바르네뮌데에가 있었다. 뭉크 작품에서 볼 수 있는 내면적이면서도 요약된 강인한 형태와는 다른 밝은 색채가 풍요스럽게 나타나 있다.


 

선박 풍경

이 작품은 신경정신 치료를 야곱슨 교수로부터 받고 회복된 후 오슬로 피요르드 연안의 크라게뢰에 체재하면서 풍경과 사회적인 모티브를 새로 추구할 때 제작한 것 중의 한 작품이다.



빨간 깔개 위에 앉은 소녀

'예술작품은 결정(結晶)같은 것이다. 이런 주장을 내세울 무렵 그의 나이는 66세(1929년)로서 에에켈리에 겨울 아틀리에를 짓고 만년을 보내면서 고독과 쇠약해진 건강과의 고투 속에 있었다. 외로움을 달래면서 제작을 하게 되는 가운데 내적상태가 표면에 드러나게 된다.


눈 속의 빨간 집

만년에 뭉크는 외면적인 화려함과는 대조적으로 1916 년 오슬로 교외의 에에켈리에 집을 사서 거기서 보내 게 되는데 사람을 피하고 사는 그의 생활은 고독한 것이었다고 한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평온한 생활을 찾을 수 있었으며, 고향의 자연과 가까이 지낼 수 있게 되었고, 자연으로부터 풍요로움을 느끼게 되면서 자연에 직면하는 자세도 갖게 된다.



등의자( 藤椅子) 곁에 선 裸婦

만년에 제작한 모델 시리즈 가운데 하나로서, 서 있는 누드를 중심으로 하여 착색되어진 억제된 빨간색, 회색 등의 톤은 원근법을 미묘하게 처리한 공간 속에 유기적인 관계를 가지면서 밀도있게 표현되어졌다. 뭉크가 여성을 주제로 그린 작품에는 몸을 보호하듯 손을 앞에 놓고 있는 경우와 손을 뒤로 돌린 경우의 두 모양이 있다.



바닷가의 여자들

이러한 주제는 뭉크가 일관해서 채택한 것 중의하나로서 판화뿐만 아니라 유화로도 남겨지고 있다. 바닷가에 서 있는 두 소녀가 수평선을 바라 보며 미래의 인생 여정을 생각하며, 부푼 희망을 일깨우고 있는 상징적 내용이다. 목판화 제작을 많이 했는데 여기에서 특이한 것은 바다 부분의 판목(版木)은 잘라내고 찍었다. 이 외에도 어떤 경우는 다른 판목과 합성을 하거나 구도가 다른 목판을 붙여 찍은 시도적인 작품도 있다. 유화작품 상단부의 노란색 형상(形象)은 월주(月柱)라고 불리는 것으로 성(性) 의 영원한 심볼로서 등장된다.



병든 아이

뭉크가 5세 때 어머니가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난 일로 인하여 뭉크의 생애는 불행하게 된다. 부친의 성격은 편벽(偏僻)하고 비뚤어진 세상을 등진 성격의 소유자였고, 어머니 대신에 집안의 살림을 맡아 보살피던 한 살 위인 누나 소피에도 뭉크가 14세 때 어머니와 같은 병으로 죽었다. 멀지 않은 죽음이 찾아올 누나 소피에의 모습과 곁에서 고개를 숙이고 고뇌에 차 있는 사람은 뭉크의 가정을 돌봐준 세상을 떠난 어머니의 여동생 칼렌 표르스 타아드로 짐작이 간다. 누나에 대한 뭉크의 사모의 정은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동질의 이미지이며, 죽음에 대한 응시와 직결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