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추억론 / 구석본
지성준
2020. 5. 27. 16:51
추억론 / 구석본
수목원을 거닐다 나무에 걸려 있는 명패를 보았다. 굵은 고딕체로 개옻나무라 쓰여 있고 그 밑 작은 글씨로 ‘추억은 약이 되나 독성이 있다’고 쓰여 있다. ‘추억이 약이 된다’ 멋진 나무야, 가까이 다가가 들여다보니 ‘수액은 약이 되나 독성이 있다’였다.
그러나 그날 이후 나는 그 명패를 ‘추억은 약이 되나 독성이 있다’로 읽기로 했다.
햇살이 영혼을 쪼아대던 봄날, 신경의 올마다 통증이 꽃처럼 피어오르면 약 대신 추억의 봉지를 뜯었다. 밀봉된 봉지에서 처음 나온 것은 시간의 몸, 시신時身이었다. 시신은 백지처럼 건조했다. 피와 살의 냄새조차 증발해버렸다. 그 안에 사랑과 꿈과 그리움들이 바싹 말라 부스러져 있었다. 그들의 근친상간으로 잉태한 언어들이 발화하지 못한 채 흑백사진으로 인화되어 있다.
약이 되는 것은 스스로 죽은 것들이다. 죽어서 바싹 마른 것들이다. 살아있는 것에서 독성을 느끼는 봄날이다.
약을 마신다. 정성껏 달인 추억을 마시면 온몸으로 번지던 통증이 서서히 가라앉는다. 나의 영혼이 조금씩 말라간다. 언젠가 완벽하게 증발하면 나 또한 누군가의 추억이 될 것이다.
봄날, 추억처럼 어두워져 가는 산길을 홀로 접어들어 가고 있는 나를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