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어떤 저녁 / 이수정

지성준 2020. 2. 12. 13:12

어떤 저녁

 

                                            이수정

 

 

  샤워기를 틀면 시간이 쏟아져 나왔다 사라졌던 계절이 보였다. 몸에 튄 오욕을 씻고 하루를 씻는 데에는 따뜻한 시간이 충분히 필요했다. 추억 소모량이 많다는 순간온수기는 이사 올 때부터 시원치 않았다. 벗어둔 옷에는 묻어온 시선들이 옷을 어떤 자세로 유지하고 있다. 털어도 잘 떨어지지 않는, 병균처럼 옮아온 말들이 증식하는 것 같지만, 옷걸이에 걸어둔다. 옷장 속에는 그런 옷들이 이미 많이 있다

 

  건냉한 집을 견디려면 귤이 필요하다. 귤은 늘 꼭 쥔 주먹을 보여준다. 주먹과 악수하려면 보자기를 내야함을 깨닫는다. 밤새 흘린 꿈이 좋지 않아 빨아 넣었던 이불은 딱딱하게 말랐다. 가습기가 있지만 아직은 꺼낼 때가 아니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