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피 루왁을 마시는 시간 / 김경희
이 메일을 확인한 것은 커피를 볶고 만 하루가 지나서였다. 여자는 원두를 담은 유리병에 로스팅한 날짜를 적어두는 것을 잊지 않는다. 인생이 타이밍이듯 커피역시 그러하다. 원두의 신선도에 따라 커피 맛은 천국과 지옥을 오간다. 배를 타고 먼 바다를 건너온 도무지 언제 볶았는지조차 확인할 길 없는 브랜드 커피를 마시면서 커피를 좀 안다고 호들갑 떠는 이들을 여자는 경멸했다. 그녀처럼 고상하고 우아한 부류를 그들 역시 이해할 수 없을 테지만 어차피 격이 다른 사람들일 뿐이다. 세상이 1퍼센트의 상류층을 위해서만 굴러간다는 것쯤은 이제 누구라도 알만한 사실이다. 신(新)인류. 여자는 그 부류에 자신이 속하게 되었음에 안도했다. 부단히 노력해서 얻어낸 성과였기에 만족감 또한 클 수밖에 없다. 마침내 안락한 세계에 편입되었을 때 여자의 다문 입술 사이에서는 옅은 휘파람마저 새어나왔다. 전동 그라인더에 스위치를 켜고 여자는 분쇄도를 에스프레소 0.5mm로 맞춘다. 사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핸드밀로 원두를 분쇄하던 그녀였다. 그러나 남편은 입맛이 까다로운 사람이다. 여자 역시 균일하면서도 고운 입자를 원했다. 판단은 그르지 않았다. 분쇄된 원두는 놀라우리만치 고르면서도 균일했다.
- 솜씨가 대단한데.
남편은 감탄해 마지않았다. 아일랜드 식탁 위에 두 잔 의 커피를 올려놓고 그들은 마주앉아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
- 무슨 커피지? 향이 무겁고 독특한 걸.
- 루왁이에요. 인류가 마실 수 있는 최상의 커피라고들 하죠.
사향고양이의 소화기관을 거친 커피 열매를 원료로 한거에요.
여자가 최상의 커피라고 힘주어 말하는 순간 남편 역시 무척이나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 말하자면 커피의 명품이라 이 말이군.
남편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여자도 별 생각 없이 서재로 향했다. 노트북의 전원을 켠다. 하나 둘 셋. 최신 사양의 PC는 부팅 되는데 단 10초도 걸리지 않았다. 바탕화면 가득 커피 향이 퍼진다. 그들이 마시는 커피와 모니터 속 커피는 같은 종류다.
하진우입니다. 낯선 제목의 이메일이 도착해 있었다. 여자는 그것이 단순한 스팸 메일이거니 하고 가볍게 생각했다. 요즈음 어디서도 개인적으로 연락 올 일이 없는 여자에게 하진우라는 이름은 그다지 중요하게 각인되지 못했다. 근래 만나는 이들이라고 해봐야 일곱 살이 된 제니가 속한 영어유치원의 엄마들과 방과 후 보내는 키즈 클래스의 강사진이 전부였다. H호텔 클럽에서 격주로 진행되는 클래스에서 제니는 이년 째 발레를 배우고 있다. 발레 클래스는 시작부터가 특별한 강좌였다. 소수의 인원으로 구성된 만큼 고가의 수업료에 걸맞은 품격을 자랑했다. 한국을 대표하는 발레리나인 유니버설 발레단의 K단장이 첫 시범 강의를 보였을 때 여자의 입에서는 탄성마저 터져 나왔다. 강 넘어 북쪽이나 경기도 외곽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문화센터와는 차원이 달랐다. 무엇보다 아무나 들어올 수 없다는 것이 H클럽 키즈 클래스의 장점이었다. 명문가의 자녀들이 하나 둘 가입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호텔 회원권의 가치도 상상을 초월했다.
- 약 7g의 커피를 원두를 내리기 직전에 갈아야 합니다.
너무 곱게 갈면 침전물이 발생하고, 너무 굵게 갈면 맛이 엷고 싱거운 커피가 됩니다.
그 순간 여자의 눈빛이 젖어들었다. 코피 루왁의 레시피를 친절하게 메모해서 보낸 남자. 그의 이름이 하진우라는 것을 여자는 그제야 알아차렸다.
- 기억해 두세요. 루왁의 맛을 최상으로 느낄 수 있는 양은 7g입니다.
여자가 분주히 움직인 탓에 커피 맛은 시지 않고 상큼했다. 최대한 우아한 표정으로 여자는 거품이 오른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우아하게 산다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일이다. 우아함이란 요란스럽지도 않아야 한다. 자연스럽고 고요하며 몹시 부드러운 것. 인생에는 두 가지 비극이 있다. 원하는 것을 얻지 못했을 때와 얻을 수 없는 것을 감히 원할 때가 그러하다. 그런 면에서 여자의 삶은 통속적으로는 비극은 아니었다. 원하는 것을 얻었을 뿐 만 아니라 얻을 수 없는 것에 대해서만큼은 포기도 빨랐다. 어차피 완벽한 인생이란 없지 아니한가. 우아하기로 작정한 여자의 삶에도 불가피한 흠집은 존재하기 마련이었다. 그러니 겨우 일곱 살짜리 제니의 눈에 들지 못한다고 해서 실망할 이유는 없다. 커피를 고르듯 달콤함이든 부드러움이든 삶에 대한 취향만 택하면 그만이니까. 여자는 자부심을 삼키듯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진하고 강한 초콜릿향이 뼛속까지 깊이 스며든다. 향에 취한 듯 여자는 슬며시 눈을 감았다. 동시에 하진우 라는 이름도 달콤한 향에 실려 공중으로 홀연히 사라졌다.
*
토요일 오후 능동 유니버설아트센터에서 열릴 공연에 가기 위해 여자는 평소보다 무척 바쁜 시간을 보냈다. 아침 일찍 커피를 볶아 두었고 일주일 사이 두 번 잡힌 골반 교정을 받기 위해 체형 관리실로 외출을 서둘렀다.
- 오늘 뭘 입을까? 제니. 이 드레스 어때?
다소 상기된 여자의 목소리 탓일까. 제니는 유독 심술궂은 표정을 지었다. 가능한 아이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여자는 숨을 고르고 또 골랐다. 크림색 시폰 드레스와 연두 빛 캉캉 드레스를 택한 것도 그런 이유다. 제니는 프릴이 과하다 싶은 드레스를 즐겼다.
- 그런 걸 꼭 해야 해?
- 무슨 말이야? 무대 위의 설렘과 성취감에 관심이 없다는 거니?
- 별로 하고 싶지 않다고. 못 알아들어?
제니는 크림색 시폰 드레스를 손으로 휙 낚아챘다. 발레 공연을 마친 뒤에는 클럽에서 키즈 파티가 예정되어 있었다. 크림색 드레스를 거울에 대보면서도 불거져 나온 제니의 입은 좀처럼 들어갈 줄 몰랐다. 여자는 ‘작은 소리로 아이를 위대하게 키우는 법’이라는 교육 서에 나온 대로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한번 자분자분 말했다.
- 제니, 그건 아주 특별한 행사야.
아무나 참가할 수 있는 흔하디흔한 행사가 아니란다.
풋. 참다못한 제니의 입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것은 일곱 살 아이의 웃음이라고 보기에는 석연찮은 구석이 있었다. 첩을 내려다보는 본처의 시선. 모성을 모르는 제니에게는 그런 위악적인 면이 있었다. 제니는 아빠에 대한 집착이 유독 강한 아이였다. 미오! 미오! 제니가 미오를 애타게 찾는다. 회백색 샴고양이 종인 미오는 남편 못지않게 제니가 애정을 갖는 대상이다. 뜻 밖에도 미오는 거실 모퉁이에서 숨죽인 채로 제니와 여자를 지켜보고 있다. 그러면서도 녀석은 쉽사리 다가오지 않는다. 혐오스러운 듯한 표정으로 제니를 주시할 뿐, 여자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사파이어 블루. 미오의 눈빛은 시리도록 차갑고 선명했다. 제니는 그대로 돌진해서 미오를 품에 안았다. 마지못한 척 제니의 품에 안긴 미오는 최대한 우아한 포즈로 꼬리를 길게 세워 올린다. 이런 상황에서는 더욱이 포즈가 중요할 테니.
- 그거 가져와.
제니가 돌연 몸을 비틀어 여자를 쳐다보았다. 그것은 흡사 명령에 가까운 말투였다. 여자의 표정이 돌처럼 굳어졌다. 늘 상 있는 일이지만 익숙해지지 않는 상황, 당돌함을 넘어선 아이의 오만함을 대할 때마다 여자의 가슴은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 그거라니...제니 뭘 말하는 거지?
- 몰라서 물어? 얘 좋아하는 거, 슬라이스 어디 있냐고?
그 순간 제니의 품에 안긴 미오와 여자의 불안한 눈빛이 공중에서 부딪쳤다. 미오는 고개를 빳빳이 든 채로 숫제 여자를 내려다보고 있다. 여자가 주는 먹이에는 도통 관심이 없는 녀석이 미오였다. 치즈가루가 토핑 된 새우도, 가쓰오부시를 얹은 참치로도 여자는 미오의 환심을 살 수 없었다.
- 내 말 안 들려? 슬라이스 가져오라고!
제니는 아예 언성을 높이고 있다. 여자도 하마터면 소리를 버럭 지를 뻔 했다. 아니, 내지르고 싶은 것은 비단 소리만이 아닐 것이다. 당장이라도 프릴이 주렁주렁 달린 드레스를 걷어내고 곧추선 두개의 엉덩이를 마구 때려 주고 싶었다.
- 오, 제니. 네가 그러면 엄마가 속상하잖니.
그러나 여자는 생각대로 행하지 못했다. 미국의 부모들이 2년 간 실험하고 입증한 사례 보고서가 담긴 ‘화내는 부모가 아이를 망친다’ 는 연구 결과가 여자의 뇌리에 깊이 각인되었기 때문이다. 자녀 교육서는 그뿐이 아니었다. 성공하는 부모 코칭 프로젝트나 재혼 가정의 부모 역할을 다룬 책들이 집안 곳곳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아동심리학을 전공한 여자도 한 때는 촉망받는 상담가였다. 남편을 만난 것도 EBS 교육 방송에서 진행 하는 5분 상담 코너를 통해서였다. 제작진을 통해 연락처를 알아낸 남편이 여자의 상담소를 찾아온 것이다.
- 소아 우울증에 대한 조언을 들을 수 있을까요?
우리 아이는 만 여섯 살입니다.
스무 평 남짓한 공간, 어렵게 세를 얻어 ‘미소 상담치료실’을 오픈한지 6개월이 지난 시점이었다. TV에 출연을 하고 칼럼을 연재하기 시작했지만 수입은 별반 나아지지 않던 시기였다. 그것은 죽기 살기로 공부를 하고 석사 과정을 밟아 아동 상담치료사라는 타이틀을 얻었지만 삶의 질이 달라지지 않는 것과도 흡사한 일이었다. 인근에 대학병원 협력의 상담센터가 생기면서 여자의 실낱같은 희망은 또 한번 길을 잃었다. 먼저 임대료가 밀렸고, 미술 치료사와 운동 치료사들이 하나 둘 대형 센터로 자리를 옮겼다.
- 아이에게는 무엇보다 엄마가 필요하다는 생각입니다.
상처 받은 우리 제니에게 좋은 엄마가 되어 주시겠어요?
세 번째 만남에서 남편은 여자에게 청혼을 했다. 마리 앙투아네트가 애용했다는 브레게 시계를 내밀면서 그는 슬그머니 몸을 밀착시켰다. 남편에게서는 달콤하고 짙은 향수 냄새가 났다. 예전 같으면 역겨웠을 향이지만 그날만큼은 여자의 코끝에 달게 스몄다. 삶이 이대로 부서질지도 모른다는 조급함 때문이었을까. 여자는 이 모든 것을 일종의 거래라고 뭉뚱그려 생각하기로 했다. 상처받은 제니를 거두는 대가로 여자가 거머쥘 수 있는 것들을 가늠해보니 조건도 나쁘지 않았다. 여자는 애써 침착한 표정을 지어보이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감정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여자에겐 무언가 마실 것이 필요했다. 여자는 커피를 한잔 더 주문했다. 쓰고 검은 음료. 오래전에도 그랬다. 학비를 벌기위해 잠자는 시간을 쪼개야 할 때도 쓰고 검은 음료는 여자의 고통을 줄여주었다. 두 번째 잔을 비우는 사이 커피는 여자의 몸 구석구석으로 빠르게 스며들었다. 신세계로의 편입. 이 모든 것을 가능케 하는 것은 어쩌면 커피일지도 모를 일이다.
- 미안하지만 이런 말해도 돼?
한 손으로 미오를 쓰다듬으면서 제니가 말했다. 여자는 최대한 차분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 무슨 말이니 제니? 어서 해보렴.
아이는 경멸이 담긴 눈빛으로 여자를 바라보았다.
- 제발 억지로 웃지 좀 마. 가면 같아!
여자는 무안한 나머지 재빨리 입 꼬리를 내렸다. 그리고 떨리는 입술을 가까스로 깨물었다. 더 이상 우아한 미소도 지어지지 않았다. 형편없는 연기력이라는 평가에 가슴을 쓸어내리는 삼류 배우처럼 쥐구멍이라도 찾아 들어가고픈 심정이었다. 그러나 이 정도쯤이야 얼마든지 참을 수 있는 일이었다. 여자는 자라오면서 혹은 성인이 된 이후에도 이처럼 안락한 생활을 해 본 적이 없었다. 원룸이라 하기에도 비좁은 자취 방, 먹고 씻고 음식을 조리하고 배설하는 곳이 덩그러니 한 공간에 놓인 열악하고 추운 방은 그나마 나았다. 호구지책으로 일을 해봐야 바닥이 훤히 드러나는 쌀독까지 여자는 빈곤의 민낯이 어떤 것인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다시는 비좁은 그 공간으로 돌아가지 않으리라 스스로 다짐했다. 사막의 광신도처럼 파리의 금융회사와 편안한 아내를 버리고 벌거벗은 채 절정 속에서 죽어간 고갱의 삶 따위를 여자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 삶은 재앙은 아니어도 형벌은 될 수 있다고 생각한 여자였다. 황급히 머리를 털고 여자는 도망치듯 부엌으로 향했다. 유리병의 뚜껑을 열자 말린 생선 슬라이스들이 먹기 좋게 낱개로 포장되어 있었다. 여자는 다랑어 향이 첨가된 것을 골라 들고 제니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한톤 낮아진 목소리로 차분하게 물었다.
- 제니...육포도 함께 가져갈까?
더듬더듬 이어진 여자의 말에 제니는 단호하고 차갑게 대답했다.
- 미쳤어. 미오를 죽일 셈이야?
여자는 머쓱해져 육포가 담긴 서랍장에서 재빨리 손을 거두었다. 여자의 두 뺨은 발갛게 달아올라 토마토처럼 붉어졌다. 훅. 어느새 입에서는 더운 한숨이 새어나왔다.
*
능동 유니버설아트센터에 도착했을 때 주차장은 이미 만 원이었다. 이날 열릴 호두까기인형 공연은 오직 최 상류층 회원을 위해 막을 올린 행사였다. 기존 공연에서는 볼 수 없는 특별한 카메오가 등장하기로 되어있는데 이례적으로 클럽의 어린이들이 카메오로 출연하는 것이 공연의 핵심이었다. 봉봉과자 장면에서 아이들이 등장해 깜찍한 춤을 선보이자 공연장 전체가 크게 술렁였다. 환호와 도취에 빠진 사람들 사이로 여자의 시선이 무대를 훑는다. 그리고 곧 한 아이에게 정지되듯 시선이 멈춰진다. 무리에 섞여 좌우로 몸을 움직이는 아이는 제니였다. 예상대로 아이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공연에 참여하자고 제안했을 때부터 회의적인 반응을 보인 아이가 제니였다. 여자는 그런 제니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어린 시절의 그녀라면 갖고 싶어 미칠 만한 것에도 제니는 도통 관심이 없었다. 남편의 성화가 아니었다면 발레 공연 역시 참가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제니는 아빠의 말에는 고집을 세우지 않는다. 그러니 남편은 제니가 여자를 손아귀에 쥐고 흔드는 것을 알지 못한다. 여자 역시 그것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어차피 책망은 여자에게로 올 터였으니.
- 내가 당신을 택한 이유를 몰라서 그래?
언젠가 제니의 돌발 행동에 놀란 여자가 슬며시 이야기를 꺼낸 적이 있다. 남편은 불에 댄 사람처럼 몹시 화를 냈다. 나락으로 떨어지듯 여자는 아득한 기분마저 들었다.
- 그건 오해에요, 난 말이죠......
- 그만 둬. 드라마에서만 보던 이야긴 줄 알았더니 당신도 똑같은 여자였군 그래?
분명히 말해두지만 내가 당신을 택한 이유는 하나야. 아동상담사라는 타이틀,
무슨 말인지 알아?
- 상담치료사들은 뭐가 달라요?
그들은 감정도 없다고 누가 그러던가요?
여자도 몹시 화가 나서 남편을 향해 비아냥거렸다.
- 영리한줄 알았더니 그것도 아니었군 그래.
난 말이지. 이제부터라도 완벽한 행복을 누리고 싶은 사람이야.
당신이 원한 것도 그런 거 아니었나? 그러니 어린아이 같은 투정은 제발 그만 둬!
여자는 남편의 말에 더 이상 가타부타 대꾸하지 않았다. 알면서도 눈감아야 하는 것들은 그 뿐이 아니었다. 그럴 때 마다 여자의 발길은 백화점 명품관으로 향했다. G브랜드의 베스트 아이템인 다이아몬드 패턴의 숄더백을 사거나 마시던 와인의 연도와 품종을 바꾸기도 했다. 그래도 허전함이 채워지지 않을 때 여자는 카페에 들렀다. 그리고 검고 뜨거운 음료, 커피를 마셨다.
- 코피 루왁, 인류가 마실 수 있는 최상의 커피가 바로 이것이죠.
남자는 언제나 같은 모습과 동작으로 커피를 내려주었다. 그는 긴 속눈썹과 달리 말이 짧았다. 여자는 그것이 마음에 들었다. 더욱이 전동그라인더를 쓰지 않고 핸드밀로 원두를 분쇄하는 커피 맛은 여타 브랜드 커피에 견줄 바가 아니었다. 원두를 분쇄하는 남자의 손길은 더없이 정교하고 섬세했다. 하물며 커피를 내릴 때 남자는 숨조차 마음껏 쉬지 않았다. 커피가 조용히 끓는 소리와 몸의 움직임만 있을 뿐 다른 무엇도 여자의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 아랍인들은 커피를 카와라고 불렀어요.
카와는 인간의 욕망을 경감시킨다는 의미를 갖고 있죠.
남자는 여자의 감정까지도 꿰뚫고 있었다. 그것을 알면서도 여자는 그저 가볍게 웃어 넘겼다. 쾌적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 남녀사이에 그것은 적당한 거리감만큼이나 중요한 요소가 아니던가. 그렇게 마주 앉아 커피를 두세 잔 쯤 마시고 나면 여자는 몰라보게 생기가 돌았다. 커피 향을 입안에 간직한 채 고국으로 돌아가던 카바의 순례자처럼 여자는 진하고 깊은 향을 머금고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그러니 여자가 지불한 것은 단순한 커피 값이 아니다. 그것은 자존감이다. 동시에 일종의 보상, 혹은 일탈의 대가였다. 여자는 커피를 마시면서 남자의 뒷모습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남자의 손끝에서 커피가 내려질 때, 뜨거운 몇 방울의 커피가 잔으로 똑 떨어질 때는 여자의 내재된 욕망도 슬그머니 꿈틀거렸다. 착 가라앉은 여자의 뇌 속을 질주하는 무엇. 여자는 커피 한 잔에 우월감과 더불어 쾌감을 샀다. 그리고 약을 삼키듯이 뜨겁고 검은 커피를 삼켜냈다.
공연은 성황리에 막을 내렸다. 봉봉과자로 분한 아이들이 무대 의상을 입은 채로 하나 둘 분장실을 빠져 나왔다. 여자는 분주함 속에서 제니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통유리 밖으로 어디서 공수해 왔는지 모를 바나나 나무가 바람에 휙휙 흔들리고 있다. 어느새 어둠이 짙게 내렸다. 여자는 밤이 되자 또 쓰고 검은 음료 생각이 간절해진다.
- 제니 아직 안나왔어?
아이와 같이 발레 클래스에 다니는 지유 엄마였다. 여자의 눈에 비친 그녀는 언제나 활기차다. 그래선지 나이가 적잖은 빌라 내 여자들의 비위도 곧잘 맞추었다. 그런 지유엄마 덕에 여자는 자연스럽게 빌라 여자들 사이에 낄 수 있었다. 그녀들은 키즈 테이블 매너 클래스에도 아이를 함께 보내는 사이였다. 덴마크 왕실 도자기를 제작하는 로얄 코펜하겐에서 공수해온 소품으로 강의를 한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빌라 내 아이들은 죄다 모여들었다.
- 정보가 빨랐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놓칠 뻔한 귀한 강좌가 아니겠어?
유년 시절부터 소셜 클럽의 일원으로서 갖춰야 할 에티켓과 매너를 배울 수 있다는 것이 강좌의 장점이라며 지유 엄마가 목소리를 한톤 높였다.
- 클래스 학기를 마치고 나면 소품은 판매할 예정이 라죠?
- 그럼. 수익금은 당연히 저소득층 아이들을 위한 교육에 기부한다니 명분도 괜찮고.
노블레스 오블리주. 모든 것이 그녀들의 우아한 삶을 위한 알리바이나 수단에 불과했다. 오전 10시. 아이들이 사라진 골목에서는 벨기에 와플을 굽거나 커피 볶는 냄새가 진동한다. 매일 마주치는 그녀들에게는 구운 빵과 날 채소, 그리고도 무언가 씹을 거리가 절실했다. 과목당 수백만 원을 호가하는 사교육비와 주말 골프가 주된 화제였으나 간혹 문화나 예술로까지 주제가 확대되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포크 소리보다 더 요란하게 수다를 떨면서 지루하고 무표정한 일상을 뒤엎을 무언가가 그녀들에겐 필요했을 터다. 그런 의미에서 여자의 등장은 실로 파격, 혹은 신선한 사건이었다.
- 제니를 견뎌 낼 수 있겠어?
차라리 이렇게 묻는 지유 엄마는 그나마 나은 편이었다.
- 세상에 아무리 돈이 좋아도 그렇지.
아아..난 죽었다 깨어나도 재취자리로는 못 갈 것 같아.
서울에서 가장 높은 평당 시세를 자랑하는 고급 빌라에 산다 해도 사람의 수준이나 관심사는 마찬가지였다. 그녀들의 한 끼를 채워줄 흥미로운 입방아, 어떻게 요리하더라도 여자는 맛깔 난 재료임에 분명했다. 서른일곱이라는 적지 않은 나이에 마흔 네 살의 성공한 벤천 기업가를 만날 확률은 그다지 많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남편은 첫 만남에서 선뜻 에르메스 라인의 시계를 내밀었다. 남자의 지갑이 열릴 때마다 쉬 열릴 것 같지 않던 여자의 입이 조가비처럼 쩍 벌어졌다. 침대 시트의 위생 상태가 우월하고 방음장치가 견고한 5성급 호텔에서 여자는 남편과 첫 밤을 보냈다. 특이한 것은 그 밤이 첫 밤이자 그들의 마지막 밤이 되었다는 것이다. 정작 결혼을 한 이후에 그들은 함께 잠을 잘 수 없었다.
- 제니가 다 자랄 때까지는 그러고 싶어. 미안해.
남편이 내건 표면적인 이유였다. 여자는 남편의 의사를 존중해 주는 것에 어렵지 않게 동의했다. 이제와 새삼스레 같이 잔다고 해도 여자 역시 아무것도 느끼지 못할 터이니 문제 될 것은 없었다. 그 대가로 여자에게는 연회비 수백만 원의 VVIP급 골드카드가 손에 쥐어졌다. 여자가 주로 결제하는 목록의 대부분은 브랜드 옷이나 하이힐이 아닌 온갖 커피들이었다. 보석을 사거나 고가의 화장품을 고르듯 여자는 기분에 따라 커피를 골라 마셨다. 베트남커피, 인도커피, 터키커피, 그리고 카우보이들이 즐겼다는 삭필터 커피까지. 여자는 최대한 우아한 포즈로 커피를 골랐고 그것을 마시며 삶을 견뎠다.
- 그러다 불면으로 토끼 눈이 되겠어요.
코피 루왁을 투명한 잔에 내어 놓으며 남자가 조용히 물었다. 여자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침묵이란 상대의 말을 무조건 막아내기에 가장 적절한 처방인 거다. 그럴 때면 남자는 또 아무렇지도 않게 시선을 거두었다. 남자가 물을 끓이기 위해 온도계의 눈금을 맞춘다. 손길은 정교했고 눈빛은 뜨거웠다. 여자는 저 혼자만의 상상으로 가볍게 몸을 떨었다. 유리창에 비친 남자의 실루엣을 바라보다가 여자는 조용히 호흡을 뱉어냈다.
- 향이 좀 진하죠? 루왁 하이클래스에요.
남자가 여자를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 궁금한 게 있어요.
한 뼘의 거리. 남자의 얼굴이 너무도 가까워서 여자는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 왜 한번도 내 이름을 부르지 않아요?
여자는 남자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안다고 해서 부를 수는 없었다. 이름을 부르면 꽃이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여자는 누구보다 그것을 잘 알고 있다.
- 네 이름을 내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니?
- 이 메일 확인을 하셨으니 까요.
- 영리한 줄 알았더니 그것도 아닌 모양이네.
남자의 눈에 잔잔한 파문이 인다. 그러나 여자는 굳이 아는 척 하고 싶지 않은 표정이다.
- 서늘하면서도 뜨거운 욕망이 커피를 부르고 있어요.
그걸 외면한다면 당신은 1분 1초도 편하게 살지 못할 거예요.
- 아니. 난 교과서적인 행복을 원하는 여자야.
원하는 커피를 마실 수 있는 지금 이대로가 더없이 좋아.
돈 많은 애인이 필요하다면 말이지, 다른 유한마담을 알아보는 게 좋지 않을까?
여자는 어느새 남편의 말투를 흉내 내고 있었다. 남자는 잠시 말이 없다가 뜬금없이 웃기 시작했다. 목을 뒤로 꺾어가며 과장되게 웃는 남자의 표정에서 미묘함이 엇갈렸다.
- 제대로 뒤통수를 맞은 기분인데요?
남자는 여자를 향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무슨 뜻일까. 여자는 그것이 몹시 궁금하면서도 한편으론 알게 되는 것 또한 두려웠다. 함정.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힌 채로 여자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신다. 남자는 지나치게 가벼운 걸음걸이로 저만치 사라진 뒤다. 착각이었을까. 커피를 내리는 뒷모습에서 여자는 남자의 전라를 본다. 물이 조용히 끓는 소리와 그저 몸의 움직임만 있을 뿐 아무것도 여자의 시야에 들어오지 않았다.
*
- 지연님. 하진우입니다.
우울할 때 루왁의 진한 향은 오히려 독이 될 수 있습니다.
남자가 보낸 두 번째 메일을 열었을 때 여자는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메일을 확인한 순간 여자의 눈빛이 물기로 반짝였다. 자신의 이름이 지연이라는 것이 여자는 새삼 놀라웠다. 누구도 이름을 불러주지 않은지 오래였다. 그 명징한 사실이 여자를 또 한번 숨죽이게 했다.
- 괜찮으시다면 오늘 들러 주시겠습니까?
좀 늦으시더라도 오래 기다리겠습니다.
남자가 보낸 메일의 하단에는 코피 루왁을 상징하는 붉은 열매가 그려져 있다. 이것은 분명한 유혹이다. 어쩌면 커피 레시피를 들먹거리며 한가로운 유한마담들의 환심을 사는 것이 남자의 특기일지도 모를 일이다. 여자는 커피 한 모금을 성급하게 마신다. 이미 식어버린 커피에서는 다소 신 맛이 났다. 여자는 커피를 한잔 더 마시기 위해 물을 올렸다. 그 사이 답장을 쓰기 위해 키보드 위에 손을 올렸다.
- 죄송합니다만, 저는 당신을 잘 알지 못합니다.
여자는 ‘당신을 알지 못합니다’ 라고 쓰려다가 ‘잘 알지 못합니다’ 가 그나마 적절한 표현인 것 같아 문장을 수정했다. 누군가와 이런 이메일을 주고받은 지도 실로 오랜만의 일이었다. 그나마 녹슬지 않은 표현력에 여자는 흡족한 마음마저 들었다.
- 다시 말 하지만 이런 사적인 내용은 불편하군요.
본인 동의 없는 메일은 삼가 주십시오.
메일을 보내고 나서 여자는 입술을 깨물었다. 부로 사뿐한 걸음을 하고는 부엌으로 향했다. 보석이 촘촘히 박힌 양문 형 냉장고를 열자 미세하고 고른 냉기가 안개처럼 뿜어져 나왔다. 여자는 냉동고에서 얼음을 꺼내었다. 그리고 볼이 터지도록 각진 얼음을 입 속에 밀어 넣었다. 우적우적. 아무리 우아한 그녀라도 얼음을 씹을 때만큼은 도저히 우아할 수 없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얼음이 입속에서 잘게 부서져 내릴수록 여자의 가슴은 자꾸만 뜨거워졌다. 그사이 물이 알맞게 끓었다. 여자는 잔에 커피 두 스푼을 넣고 융 드립을 이용해 물을 내렸다. 진하고 달콤한 향이 삽시간에 주위에 퍼졌다. 여자는 가능한 코를 무한대로 넓혀 숨을 들이쉰다. 흡. 뼈 속까지 진하고 깊은 향이 스며든다. 상기된 얼굴은 거짓말처럼 금세 차분해졌다. 여자는 양문 형 냉장고의 전면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낯설게 쳐다보았다. 전날보다 화사하고 단아하다는 생각에 여자는 조금 안심이 되었다. 아이를 낳지 않은 몸은 군살하나 없이 매끈했다. 그 명징한 사실이 여자를 잠시나마 기쁘게 했다. 악! 습관처럼 입 꼬리를 치켜 올리던 여자는 반사된 형체를 보고 그만 소리를 지를 뻔 했다. 돌아보자 거기 제니가 서 있었다. 마치 오래전부터 지켜보고 있었다는 듯 매우 일그러진 표정으로.
- 미쳤구나. 이제 아주?
제니가 여자에게로 한 발짝 다가왔다. 여자는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 내가 아무것도 모를 거라고 생각해?
뭔가 둔탁한 것에 머리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어떻게든 해명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 오해야..그건 오해라고, 제니.
- 간밤에 아빠 방으로 들어가는 걸 분명히 봤는데, 그게 오해라고?
휴. 어느 순간 여자의 입에서 안도의 한숨이 새어나왔다. 제 아무리 위악적인 아이라고 해봐야 일곱 살짜리였다. 여자의 섣부른 추측은 다행히 예상을 빗나갔다. 카페인 탓일지도 모른다. 여자는 커피를 좀 줄여야겠다는 생각을 잠시 했다. 그래도 안심할 수만은 없는 일이다. 제니가 여자를 주시하고 있는 한, 아니 샴 고양이 미오가 감시하고 있는 한 여자의 삶은 백퍼센트 안전할 수 없는 일이니까.
- 오! 제니. 그게 마음에 걸렸구나.
여자는 능숙하게 아이의 불안한 심리에 대해 긍정을 해주었다.
- 아빠 방에 들어갔던 건 네 발레 공연 사진을 고르기 위해서야.
제니가 많이 속상했던 모양이네? 엄마가 미안하구나.
먼저 아이의 마음을 읽어라. 그것은 효과적인 의사소통을 하기위한 첫 번째 기술인 셈이다. 제니와 심리적으로 힘겨루기를 해봐야 이득이 될 게 없었다. 여자는 제니와 같은 아이들을 수 없이 겪어왔다. 심리전에서는 먼저 흥분하는 사람이 지게 되어있었다.
- 아빠는 누가 뭐래도 제니의 몫이야.
엄마는 절대로 네 것을 가로 채지 않아. 믿어주겠니?
다행히 제니의 표정은 한결 누그러졌다. 오히려 아이의 품에 안긴 미오만이 여전히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여자를 쳐다볼 뿐이다. 여자는 미오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렇지만 내색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제니는 미오를 무척이나 아꼈고 영악하고 질투심이 많은 미오 역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선지 더욱이 여자에게 경계를 풀지 않는 녀석이 미오였다. 여자는 그것이 몹시 불쾌했지만 일단은 감정을 노출하지 않기로 한다. 께름칙해도 견뎌야 하는 것은 있게 마련이니까. 이 정도에 무너질 여자였다면 진즉에 그만두었을 일이다. 여자는 비로소 희미하게 웃어보았다.
*
미오가 사라졌다. 그리고 같은 시각에 빌라 내 고양이들이 죄다 자취를 감추었다. 유일한 흔적이라면 103호에서 키우던 고양이의 사체가 발견된 것이었다. 여자는 그 죽음을 클럽에서 운동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목격하게 되었다. 아니 죽은 동물의 사체를 직접 보지는 못했으므로 그것이 목격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아무려나 103호 고양이는 죽었고, 미오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그날은 마침 백화점 와인 매장에 신제품이 출시되는 날이었다.
- 세상에, 이게 무슨 끔찍한 일이라니, 제니야.
여자는 클럽에서 운동을 마치고 백화점 수입 매장에 들러 한 달 치 와인을 사고 돌아오던 길이었다. 경비실 초소 앞에 빌라 내 여자들이 삼삼오모 있었다. 어둡거나 불안한 그들의 표정으로 보아 무슨 불길한 일이 일어났음을 여자는 직감했다. 아니나 다를까. 103호 고양이가 빌라의 상징물인 오래된 대추나무 아래 처참히 죽어있었다고 한다. 비상벨이 울렸고, 동시에 경비 실장이 달려 나왔다. 잇따라 용역업체에서 파견된 청소부 아주머니 여럿이 들이닥치면서 흰색 모포로 둘러싸인 동물의 사체는 삽시간에 자취를 감추었다.
- 쥐약이라니. 우리 동네에도 쥐가 있단 말이야 그럼?
- 무슨 대책을 세우던가 해야죠. 이건 너무 끔직한 일 아닌가요?
- 쉿! 완전히 똥 밟은 거라고. 부동산마다 입단속들 시켜.
저마다 한 마디씩 하면서도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반응들이었다. 여자가 지하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돌아왔을 때는 모든 상황이 종료된 뒤였다. 나뭇가지가 조금 부러진 것 외에는 대추나무도 멀쩡했고 화단에는 피가 스며든 흔적조차 없었다.
- 제니, 괜찮겠어? 우리 지유는 또 어떡한다니.
지유엄마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여자를 바라보았다.
- 그러게요. 우리 제니가 받을 충격이 상당할 텐데......
말끝을 흐리는 여자의 표정은 더 없이 심난해 보였다. 좀 이상하지 않아? 지유 엄마가 은근한 눈빛으로 여자를 쳐다보며 물었다.
- 이상하다니 뭐가요?
- 미오도 그렇고 우리 나비도 그렇고 참으로 영악한 녀석들이잖아.
- 그렇긴 하죠. 생전 과식도 소식도 하지 않으면서 규칙적으로 식사를 했고
무엇보다 아무거나 주워 먹는 미오가 아니었죠.
- 뭔가 이상해, 이상한 냄새가 나......
지유엄마의 눈빛에서는 예사롭지 않은 광채가 번뜩였다. 그러나 여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예전에 지유 아빠의 바람기를 의심할 때도 저런 눈빛이었더랬다.
당신이 죽였어. 유치원에서 막 돌아온 제니가 다짜고짜 여자를 코너로 몰아붙였다.
- 난 아니야, 엄마가 막을 수 있는 일이 아니었어, 제니!
제니는 여자를 밀치고 온 집안을 들쑤시고 다녔다. 미오! 미오! 그러나 어디서도 미오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제니는 유괴당한 자식을 둔 어미처럼 거실 바닥에 주저앉아 통곡을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제니의 전화를 받은 남편이 성급히 집으로 돌아왔다. 흔치 않은 일이었다. 일하는 도중에 집에 오는 일이란 좀처럼 없는 사람이었다.
- 무슨 일이야, 대체?
여자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한바탕 소란이 휩쓸고 간 집안을 남편은 휘휘 둘러보았다. 거실이며 부엌 할 것 없이 제니가 던지고 부서뜨려 밟은 물건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있었다. 제니는 울다가 웃다가 급기야는 먹은 것들을 죄다 토해냈다. 유치원에서 간식으로 먹었음직한 유기농 쿠키와 저지방 우유 따위가 뒤섞인 토사물에서는 시큼한 냄새가 났다. 제니가 포악스러운 행동을 하며 구르는 동안에도 여자는 가만히 지켜보기만 할 뿐 아무런 제지도 하지 않았다. 아이의 어깨를 잡고 엄하게 경고를 하지도 않았다. 아이의 발악이 길어야 한 시간을 넘지 못한다는 것을 여자는 알고 있었다. 예상대로 아이는 거품을 문 채로 바닥에 자지러졌다. 담당 의사가 서둘러 왕진을 다녀갔고 미국에 있는 남편의 가족들이 번갈아 전화를 걸어왔다. 통곡하듯 울부짖으면서도 친모에게 전화를 걸지 않은 것은 제니의 자존심이었을까. 안정제를 맞고도 한참이 지나서야 아이는 잠이 들었다. 슬픔과 무력감이 어린 눈가에 눈물 자국이 허옇게 말라붙어 있다.
- 고양이 하나 돌보지 못해서 저 불쌍한 아이에게 상처를 줘야해?
남편이 다짜고짜 여자를 다그쳤다. 여자는 어이가 없었다. 막을 수 있는 일도 아니었지만 굳이 막고 싶은 일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억지라는 생각이 들자 여자도 슬그머니 화가 났다.
- 사람이 죽은 것도 아니고, 그깟 고양이 한 마리 죽은 거에 내가 죄책감을 느껴야 해요?
- 미오가 우리 가족에게 어떤 의미인지 몰라서 그래?
- 최상급 사료를 먹이고 천연 샴푸로 목욕을 시켜 털을 가꿔봐야 고양이일 뿐이야.
미오에겐 여기가 감옥이었을 수도 있어요, 안 그래요?
- 무슨 해괴망측한 소리야, 그게?
- 제 아무리 고고한 척, 우아한 척 해봐야 발정 난 고양이에 지나지 않는다고요.
거리에 떠돌아다니는 도둑고양이랑 눈이 맞아 나갈 수도 있는 거고.
- 헛소리 마! 미오가 당신 같은 줄 알아?
- 그...그게 무슨 말이죠?
여자는 남편을 노려보았다. 자꾸만 몸이 떨려왔다. 그깟 고양이 한 마리의 죽음에 저토록 광분하는 남편이라니. 여자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뿐만 아니라 남편의 표정은 몹시 차가웠다. 행복도 우아한 삶도 손에 잡히리라 생각했던 건 여자의 착각이었을까.
- 지금 나를 한낱 고양이 따위에 비하는 거예요?
그럼 내가 나가주면 되겠군요. 안 그래요?
여자는 호기롭게 현관으로 뛰쳐나갔다. 남편은 여자를 잡지 않았지만 등 뒤에다 대고 서늘하리만치 차가운 경고를 했다.
- 좋아. 하지만 명심해, 이대로 나간다면 말이지, 다시는 돌아올 수 없어.
미오가 그랬듯이 말이야!
그러고 싶지 않았지만 여자는 저도 모르게 발을 주춤했다.
- 떠돌아다니는 도둑고양이랑 눈이 맞았다 해도, 난 눈 한번 감으면 그만인 남자야.
- 뭐라고요? 제니 핑계로 날 거부한 건 당신이야!
그런 당신이 밖에서 뭘 하고 다니든 쿨 하게 눈감아준 건 바로 나라고!
여자는 억울한 듯 다급하게 소리쳤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여자의 등 뒤에서 식은 땀 같은 것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이윽고 남편이 뚜벅뚜벅 걸어와 여자와 마주 섰다. 이렇게 가까이 서 본 것도 실로 오랜만이었다. 남편은 여자 모르게 향수를 바꾼 모양이었다. 냉정하고 차가운 향이 코끝에 시리게 스몄다.
- 전에도 말했지만 난 교과서적이고 완벽한 가정을 원해.
인테리어 소품을 고르듯 당신을 택했고,
당신 역시 커피를 고르듯 날 택한 거 아니었나?
여자는 커피라는 말에 잠깐 마음이 흔들렸다. 듣고 보니 틀린 말도 아니었다. 초반에 결말이 예상되는 김빠진 내용의 영화라 해도 값을 지불한 이상 중간에 나갈 수는 없었다.
- 분명히 말해두지만, 난 협상 따위는 모르는 사람이야.
그러니 뭘 선택하든 그건 당시 몫이야.
남편은 단호했다. 그의 확고한 믿음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애당초 여자가 가진 힘으로는 뒤집을 수 있는 관계가 아니었다. 한 발 물러서 생각해보면 쉽게 포기할 수 없는 자리라는 것 또한 분명했다. 여자가 평생 노력해도 갖기 힘든 부와 안락함, 속해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명예가 되는 클럽의 회원권이 자꾸만 눈앞에 아른거렸다. 여자는 고개를 살짝 숙이고 대답을 유예했다. 남편은 흡족한 표정을 지어보이며 등을 돌렸다. 여자는 가슴을 서너 차례 조용히 쓸어내린다. 그럴듯한 물질의 유혹과 이미 전투의지를 상실한 여자. 초점을 잃은 여자의 눈은 흐릿했다. 하루 사이에 여자는 몰라보게 늙은 얼굴이다.
*
여자는 아침 식사로 빵을 구웠다. 메뉴는 버터를 듬뿍 넣은 크루아상과 붉은 건포도 잼, 그리고 향이 달콤한 커피가 전부였다. 제니를 위해서는 프랑스산 블랙 라즈베리를 넣어 반죽한 유기농 쿠키를 꺼내 놓았다. 눈이 퉁퉁 부운 제니는 밤사이 더 야윈 얼굴이다. 입맛을 잃었는지 빵은커녕 그토록 좋아하는 쿠키에도 손을 대지 않았다.
- 제니, 빵이 힘들면 죽이라도 쑤어 줄까?
아이의 표정은 절망의 끝에 서있는 듯 가련해 보였다.
- 악몽일 뿐이야. 잊어버려, 제니.
여자는 대범하게 아이를 위로했다. 남편은 뜻밖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침묵이 때로는 약이 될 때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듯 했다. 여자와 남편은 처음으로 마음이 통한 것이다.
- 너만 좋다면 주말에 펫 시티에 들러보는 건 어떨까?
여자는 조금 더 상냥해진 톤으로 아이에게 말을 걸었다. 어쩌면 미오가 사라진 것이 기회가 될지도 모를 일이다. 여자가 지나온 구불구불한 진창길, 험난한 산맥에 막혀 어떤 지원도 받을 수 없는 지형을 걸어오면서 여자를 견디게 한 것은 그래도 반전이 있을지 모른다는 가느다란 희망이었다. 산다는 것이 얼마나 비참하고 처절한 일인지 여자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이제 막 베이스캠프를 친 여자의 삶, 거센 바람에도 끄떡하지 않을 견고한 캠프를 친 여자는 그것을 쉽게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9시 10분. 빌라 앞에서 크락션이 서너 번 크게 울렸다. 여자의 시선이 창문 너머로 향한다. 영어 유치원 버스가 도착해 있었고, 빌라 내 아이들이 하나 둘 모습을 드러냈다.
- 우리 제니, 오늘은 뭘 입을까?
프릴이 층층이 달린 초콜릿 빛 드레스를 꺼내 놓으며 여자는 과장되게 미소를 지었다. 밤잠을 설친 탓에 속이 조금 쓰렸다. 여자는 커피를 좀 줄여야겠다는 생각을 여러 번 했다. 어느새 옷을 갈아입은 제니는 거대한 초콜릿 케이크처럼 보였다. 먼저 노란 버스에 탄 아이들이 제니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제니는 마지못해 버스의 계단을 오른다. 유치원 버스가 느린 속도로 골목을 누빈다. 빌라 여자들은 영화의 한 장면처럼 제각각 아이들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여자도 버스가 사라질 때까지 오래도록 손을 흔들었다. 버스가 언덕 너머로 자취를 감추고 나서야 여자는 어색한 웃음을 거두었다. 입가는 미세하게나마 경련이 일었다. 집으로 돌아왔을 때 남편은 이미 자리에 없었다. 여자는 식사를 중단하고 커피를 내리기 위해 물을 올렸다. 그리고 서재로 걸어가 노트북의 전원을 켰다. 하나 둘 셋. PC가 부팅 되고 바탕화면 가득 커피 향이 퍼진다. 여자는 더욱이 검은 음료 생각이 간절해졌다.
- 지연님, 하진우입니다.
보내드린 루왁 커피 맛은 보셨는지요?
세 번째 메일이 도착해 있었다. 물이 끓는 소리가 조용히 거실 안으로 퍼진다. 여자는 원두가 담긴 유리병을 열었다. 7g씩 진공 포장을 해둔 탓에 유리병에서는 향기가 새지 않았다.
- 원두를 너무 곱게 갈면 침전물이 발생하고
너무 굵게 갈면 맛이 엷고 싱거운 루왁이 됩니다.
금박포장을 벗겨내자 볶아둔 원두의 향이 삽시간에 퍼졌다. 여자는 커피 두 스푼을 융 드립에 넣고 적당히 끓어오른 물을 서서히 부었다. 루왁 커피는 3분 안에 걸러내야 해요. 남자의 음성이 귓가에 들려오는 듯 했다. 여자는 미소를 지으며 모니터를 주시했다.
- 고양이는 잘 묻어주었습니다. 미오가 사향 고향이가 아니라서 천만 다행이군요.
다음 계획을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그리고 행운을 빕니다.
여자는 잠시 호흡을 고르고 키보드를 끌어당겼다. 삭제 버튼을 누름과 동시에 편지함의 숫자는 금세 0으로 바뀌었다. 여자의 손길은 곧 휴지통으로 향한다. 하진우입니다. 라는 제목을 단 편지들이 그 외도 여럿 보관되어있었다. 여자는 주저하지 않고 그 안의 내용들을 모조리 삭제했다. 여자의 입가에 희미하게 미소가 번진다. 어디선가 커피 볶는 냄새가 스멀스멀 풍겨온다. 그 향이 여자의 집안인지 다른 집인지는 여자로서도 잘 구분이 가질 않았다. 아침에 커피를 볶는 사람은 여자만이 아닐 것이다. 빌라에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커피를 볶고 또 어디론가 이 메일을 보내고 때론 삭제를 할 테니.
- 기억해 두세요. 코피 루악의 맛을 최상으로 느낄 수 있는 양은 7g입니다.
여자는 최대한 우아한 표정으로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우아하게 산다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그것은 요란스럽지도 않다. 자연스럽고 고요하며 부드러운 삶. 그러니 커피를 고르듯 취향을 택하면 그만인 거다. 자부심을 마시듯 여자는 쓰고 검은 커피를 삼켰다. 진하고 강한 캐러멜 향이 뼈 속까지 깊이 스며든다. 어디선가 흙냄새나 곰팡내 같은 것이 스멀스멀 풍겨온다. 여자는 성급히 다음 모금을 마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