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한 꿈 / 김소연
지글지글 끓어오르는 대기 속에선 시간마저 녹아 흐르는 것 같다. 시계가 축축 늘어진 그 유명한 달리의 그림 속에 빠져 허우적대는 듯한 느낌이랄까. 현실로 돌아가는 출구는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점점 그 느낌에 중독되어가고 있다. 시간이 모호해지는 가장 초현실적인 공간이야말로 지금의 내게 가장 필요한 것일 테니까. 나는 어쩌면 내가 속한 시간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 먼 곳까지 여행을 떠나왔을 것이다.
하늘은 더없이 파랗고 구름은 아래 세상의 찌는듯한 열기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다는 듯 무심히 흐르고 있다. 얼마나 지났을까. 페티에에서 손목시계를 잃어버린 뒤 자연과 본능에 따라 며칠을 보냈다. 태양이 커튼 틈을 비집고 눈을 적시면 눈꺼풀을 열었고, 뱃속에서 진동이 느껴지면 식당을 찾았으며, 바닷물에 노을이 서리면 바에 기어들어가 맥주를 마셨다. 그것이 내가 몸으로 느끼는 시간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8월의 태양을 직각으로 흡수한 아스팔트 위에서 트렁크 가방을 의자 삼아 몇 시간째 앉아있으니 아무런 시간조차 느껴지지 않는다. 물컹물컹한 꿈 속을 헤엄치는 내 모습이 환각처럼 눈앞에 아른거린다.
얼이 반쯤 빠진듯한 내 모습에 버스기사는 미안한 표정으로 연신 미소를 짓는다. 도대체 터키인들의 금방은 어느 정도의 시간을 의미하는 걸까. 금방 온다던 다음 버스는 도무지 올 생각조차 없고, 함께 기다리던 현지인들은 현명하게도 지나가던 차들을 얻어타고 하나 둘씩 사라졌다. 이제 여기엔 고속도로 한복판에서 대책 없이 고장 나버린 버스와, 탈진 직전인 나와, 지나치게 친절해서 화도 내기 어려운 버스기사만이 남았다. 나에게도 기회가 없었던 건 아니다. 하지만 아무리 터키 사람들이 친절하다고 해도 여자 혼자 나선 여행에 아무 차나 얻어 타고 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빌어먹을 기사가 다음 차는 금방 온다고 하지 않았던가.
새파란 잉크빛 바다를 품은 지중해의 휴양도시 페티에에서 파묵칼레까지는 버스로 5시간 거리다. 페티에의 작은 호텔방 침대에서 눈이 떠지자마자 평소의 나답지 않게 부지런을 떨었던 건, 파묵칼레에서 만큼은 시간을 두고 마음에 드는 숙소를 고르고 싶어서였다. 정확하게 일정을 짜고 움직이는 여행은 아니었지만, 그 곳에서는 적어도 한 달 이상 머물 계획이었다.
빙하처럼 하얀 석회산의 군데군데에 파란하늘을 담아 고여있는 푸른 물. 인터넷 서핑 중 우연히 보게 된 터키 파묵칼레의 사진은 참 평화로워 보였다. 묵직한 피곤에 시달렸던 나는 사진 속 푸른 물처럼 아무도 모르는 낯선 땅에 가만히 고여있고 싶었다. 그로부터 6개월 뒤 직장을 그만뒀고, 한 달을 더 계획한 끝에 세계여행을 떠났다. 오늘은 세 달 동안의 유럽 여행을 거쳐 터키로 들어온 지 열흘 째 되는 날이다.
갑자기 봉고차 한 대가 멈춰 섰다. 버스기사와 봉고차 운전자는 서로 껴안고 뺨을 맞대고 어깨동무를 하며 한참 시끄럽게 이야기를 나눴다. 누가 사람 꽤나 좋아하는 터키인들 아니랄까봐 고속도로 한복판에서 지인을 만났다고 차를 세우고 저리도 호들갑을 떠나 생각하고 있는데, 갑자기 기사가 휘파람을 불며 나를 향해 손짓을 했다. 투 파묵칼레… 버스 캔슬…. 팔로우 디스 프렌드. 현지어와 섞인 영어를 대충 해석해보니 다음 버스는 취소됐고, 이 봉고차 운전자는 자신의 친구인데 나를 파묵칼레까지 태워다 줄 거라는 말인 것 같았다. 혹시 납치해가는 게 아닐까하는 의구심으로 봉고차 운전자를 쳐다봤다. 그는 나의 의심 섞인 시선이 무안하게도 순박하게 웃었다. 약간 머리가 벗겨져 나이를 도통 종잡을 수 없는 얼굴이었지만 아래로 기운 초승달 모양의 눈매가 어린아이마냥 선해보였다. 어차피 내 몸 속의 물기를 쪽쪽 빨아들이는 8월의 태양 탓에 더 이상 기다릴 힘도 남아있지 않았다.
긴장한 채 여권과 돈이 든 작은 가방을 움켜쥐고 한 시간이나 달렸을까. 데니즐리라는 간판이 보였고 봉고차는 멈췄다. 데니즐리라면 파묵칼레 인근 마을이다. 문제는 인근 마을이지 파묵칼레는 아니라는 것이다. 나는 겁에 질린 표정으로 운전자를 바라봤고, 그의 고갯짓을 따라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또다른 작은 버스가 보였다. 그 차로 옮겨 타라는 것 같았다. 진짜 어디로 팔려가는 걸까. 하지만 선택의 여지도 없었다. 이 차나 저 차나 위험하다면 어차피 마찬가지일 것이다. 낯선 차에 내 몸을 실은 순간, 운명은 이미 내 의지를 벗어났다고 생각했다. 트렁크를 끌고 다시 낯선 버스로, 아니 새로운 운명의 길로 발걸음을 옮겼다.
웰컴 투 파묵칼레.
문을 열자 기분 좋게 조율된 첼로소리처럼 낮게 깔리는 목소리가 퍼져왔다. 뒷좌석에 트렁크를 실은 뒤 보조석으로 올라타며 목소리의 주인공을 쳐다보았다. 운전석에 앉아있는 그의 옆으론 오후의 태양이 늘어지며 긴 그림자를 그려내고 있었다. 거친 태양에 그을린 구릿빛 얼굴과 굵게 곱슬거리는 갈색 머리칼이 열기 속에서 옅게 흩어졌다. 운전대에 걸쳐있는 기다란 손가락 사이에서 담배연기가 너울거리며 피어올랐다.
내가 자리에 앉자 그는 담배를 비벼 끄더니 고개를 반쯤 돌려 나를 바라봤다. 짙은 눈썹과 오뚝 선 콧날, 약간은 아래로 흘겨보는 듯한 눈동자엔 반항아 같은 태도가, 입가엔 건방진 미소가 어려있었다. 여행자에게 비굴하게 굽신거리지 않겠다는 의지였을까, 아니면 한창 나이에 한번쯤 거쳐가는 통과의례처럼 자신에게 그런 이미지를 부여하고 싶었던 걸까. 오래 전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던 온갖 기억들이 떠오르며 이상하게 명치 끝이 아려왔다.
한국 여자에게 지나칠 정도로 친절한 다른 터키인들과 달리 그는 운전하는 내내 아무 말이 없었다. 도착한 곳은 한 작은 호텔 앞이었다. 이미 해는 산 아래로 넘어갔고, 도시가 아닌 이 곳은 새카만 어둠 속에 잠겨있었다. 버스에서 내리자 파란 꽃무늬가 그려진 히잡을 두르고 이와 대조적으로 양 볼이 붉은 중년 아줌마가 뛰어나와 얼떨떨해 있는 나를 끌어안았다. 돌아가신 엄마처럼 푸근한 몸매에 지금껏 굳었던 마음이 사르르 녹는 것 같았다.
그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영어가 서툴러서인지 원래 말투가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머뭇머뭇 또박또박 말하는 그의 목소리는 더위 속에 녹아내린 캐러멜처럼 내 몸에 끈적하게 달라붙었다. 그 청년은 히잡을 쓴 아줌마의 아들이었고, 이 호텔의 사장이었다. 이름은 카짐. 카짐은 주로 투숙객을 모으고 투어를 알선하는 등 호텔을 총괄적으로 관리하고, 그녀는 음식과 청소를 도맡아한다고 했다. 호텔은 생긴지 두 달 정도 됐으며, 오픈 기념으로 장기투숙객에게 특가를 제공해준다는 말에 귀가 솔깃해지긴 했지만, 일단 하루치 숙박비만 지불했다.
그는 나의 커다란 트렁크를 가뿐히 들고 2층으로 올라갔다. 그를 따라 계단을 올랐고 복도를 걸었다. 아무 말도 없이 트렁크를 질질 끌며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에 붙은 그림자가 어딘지 모르게 쓸쓸해보였다. 나는 자유로운 여행자고, 아무리 유명한 관광지라지만 그는 이 작은 마을의 작은 호텔에 묶인 몸이다. 어쩌면 매일 들고 나는 여행자를 보며 그 역시 젊음의 특권이라 할 수 있는 일탈을 꿈꾸었을 테고, 그러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를 한탄했을 지도 모른다. 마치 얼마 전의 나처럼. 나는 이제 혼자가 되어서 정말 자유로워졌을까. 어쩌면 지구라는 별 안에 갇힌, 또 다른 새 번호를 부여 받은 죄수이지 않을까.
방은 밝고 깨끗했다. 노란색으로 페인트칠 된 벽엔 그 흔한 여행자들의 발자국 하나 보이지 않았다. 침대는 다소 딱딱했지만 푹 꺼진 매트리스보다는 나았다. 침대와 작은 책상과 나무 의자가 전부인 작은 방이었지만 아담한 게 마음에 들었다. 완전히 빠지지 않은 페인트 냄새가 약간 거슬렸지만, 어차피 하루치 방값만을 계산했기에 정 신경이 쓰인다면 내일 숙소를 옮기면 된다. 차가운 물에 샤워를 하고 나와 창문을 여니 온갖 나무들의 습한 냄새가 훅하고 하루동안의 피로처럼 무겁게 몰려들었다. 침대에 쓰러졌다.피곤했는데도 낯선 곳이라 눈이 일찍 떠졌다. 아침식사를 하고 호텔을 둘러봤다. 축축하지만 향기로운 아침공기가 발걸음을 가볍게 했다. 새로 지은 호텔이라 홍보가 안되었는지 투숙객이 많지 않았다. 그래서 그런 ‘납치극’을 통해 손님들을 호텔로 불러오는 듯 했다. 어젯밤 나를 데려온 카짐은 아마도 또 길에서 나 같은 여행자를 찾아 헤매고 있겠지. 지중해를 연상시키는 하얀 외벽을 가진 3층 높이의 호텔은 20개 정도의 방과 식당, 작지만 깨끗한 수질의 수영장을 가지고 있었다. 뽕나무 그늘 아래 걸린 해먹은 낮잠 자기 딱 좋은 장소였다. 딱히 흠잡을 데 없어보였고 몸도 피곤하고 여기까지 오게 된 것도 인연일 텐데 굳이 다른 숙소를 찾아 헤매고 싶지 않다는 데에 생각이 이르자, 아줌마를 찾아가 덜컥 한 달치 숙박비를 계산해버렸다.
고단했던 여정 탓인지 오늘 하루는 무작정 쉬고 싶었다. 따가운 햇볕을 피해 수영을 했고, 썬베드에 누워 책을 읽었다. 식당에 앉아 차이를 마시며 눈 덮인 것 같은 하얀 석회산을 하염없이 바라보다 방으로 돌아와 에어컨을 낮게 틀어놓고 낮잠을 잤다.
눈을 떠보니 이미 온갖 사물들의 어두운 그림자가 방안에 웅크리고 있었다. 일어나 스위치를 눌렀다. 불이 들어오지 않았다. 스위치를 올렸다 내렸다 반복했지만 전구는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에어컨이 작동되는 걸 보니 전구가 나간 모양이었다.
호텔 프런트로 내려갔다. 아무도 없었다. 식당쪽으로 갔다. 더운 날씨 탓인지 웃옷을 벗은 채 청바지만 입고 앉아 TV를 보고 있는 카짐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는 인기척에 뒤를 돌아보았다. 그와 눈이 마주쳤다. 쌍꺼풀이 짙게 패인 그의 눈은 달콤한 꿀처럼 은은하게 빛났고, 땀이 밴 몸엔 초콜릿이 녹아 흐르는 것 같았다. 갑자기 피가 심장으로 쏠리는 것이 느껴지면서 현기증이 났다. 나는 벽을 짚고 침착하게 방의 불이 나갔다,고 말했다. 그는 대수롭지 않게 잠깐만 기다리라고 곧 올라가겠다,고 말하고는 다시 시선을 TV로 돌렸다. 나는 식당 냉장고에서 차가운 맥주 두 병을 꺼냈다.
터키인답게 곧 올라온다던 그는 한 시간이 지나도록 오지 않았고, 나는 점점 방의 어둠에 익숙해졌으며, 빈 속에 마시는 맥주 탓에 취기에 잠겨갔다. 그 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에어컨을 끄고 테라스로 향한 창문을 활짝 열었다. 이슬람인들이 진리라고 믿는다는 햇노란 달빛이 방 안으로 수줍은 얼굴을 내밀었다.
의자에 오른 카짐은 팔을 들어 전구를 이리 돌리고 저리 돌렸다. 달빛을 받은 팔의 근육이 움직임을 따라 물결처럼 춤을 췄다. 그는 안 되겠던지 전구를 뺐다가 다시 꼈다. 내게 손짓으로 스위치를 올려보라고 했다. 스위치를 올렸지만 불은 여전히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포기하지 않고 또 전구를 이리저리 돌렸다. 나는 그의 모습을 마치 행위예술을 감상하는 관객처럼 가만히 지켜봤다.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눈물이 났다.
전구가 완전히 나간 거 같아.
새 걸로 바꿔줘.
여분이 없어. 지금 가게가 문을 다 닫았구. 그럼 다른 방으로 바꿀래?
… 아니. 그럼 됐어. 내일 바꿔줘. 이미 어둠에 익숙해졌는데…
그는 그제서야 의자에서 내려왔다. 나는 그의 눈동자를 똑바로 쳐다봤다. 아마도 그의 눈은 아직 완전히 어둠에 익숙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나를 쳐다보고 있는지 아니면 그냥 허공을 응시하는지 알 수 없었다. 달빛이 머뭇거리며 그의 주변을 맴돌았다. 그는 발걸음을 떼지 않고 한참을 그렇게 서 있었다. 그 순간 그의 눈동자 역시 가볍게 떨리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숨이 턱 막혀왔다. 아마도 대기를 달궜던 지독한 낮의 열기가 식지 않고 열린 창문으로 몰려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맥주나 더 갖다 줄래? 시원한 걸로.
터키의 맥주에서는 시큼한 향이 났다. 나와 카짐은 침대에 나란히 앉아 벽에 기댄 채 차가운 맥주를 목구멍으로 넘기고 있었다.
이슬람인들은 술을 마시지 않는다고 하던데…
난 이슬람교를 믿지 않아.
진짜? 나도 그런데…
그는 살며시 웃는다. 히잡을 두른 아줌마와 이슬람교를 믿지 않는다는 아들. 그의 고단할 것 같은 삶이 느껴졌다. 하지만 나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어차피 각자 지고 있는 삶의 무게는 그 어느 누구도 덜어줄 수 없으니까. 정적만이 자유롭고 싶지만 지구라는 별에 갇힌 두 사람의 영혼을 위로했다. 하지만 그의 목을 타고 넘는 맥주 소리가 정적을 깰 만큼 유난히 크다고 생각하는 순간, 나는 그의 손을 잡았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어둠 속에서 선명하게 빛나는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는 게 보였다. 나는 맥주병으로 차가워진 손으로 그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그리고 떨리는 눈꺼풀에 입술을 지긋이 눌렀다. 짧은 탄성과 함께 뜨거운 입김이 내 목에 간지럽게 닿았다. 나는 그의 날카로운 콧선을 혀로 핥으며 내려와 그와 뜨겁게 입을 맞추었다.그는 기다렸다는 듯 입을 벌렸고 뜨겁고 축축한 혀가 도발적으로 내 입 속을 파고 들었다. 그의 길고 감각적인 손가락의 감촉은 몸 속을 흐르는 피처럼 내 몸의 가장 은밀한 부분까지 퍼져 나갔다. 열정 앞에서 결코 인내하지 않는 젊음은 뜨거움을 견디지 못하고 거추장스런 옷을 벗어 던졌고, 나 역시 젊음에 전염된 듯 나를 감싸고 있는 모든 것을 훌훌 벗어버렸다.
나는 손 끝으로 단단하면서도 부드러운 그의 살갗을 느꼈다. 그의 몸은 근육으로 다져져 있었고, 초콜릿색 피부는 달콤함으로 가득차 있었다. 달빛에 그의 피부가 이따금 반짝반짝 빛났고, 나는 황금을 숭상하는 부족처럼 그의 몸을 진지하게 탐했다. 무의식 속에 깊게 눌려있던 그 어떤 억압조차도 이 낯선 땅과 이 낯선 남자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욕망은 바다처럼 나의 몸 안에서 흘러 넘쳤고, 그는 바다의 깊숙한 곳까지 헤엄쳐 들어왔다. 우리는 거대한 바다의 품 안에서 쾌락의 소용돌이로 빨려 들어갔다. 나의 몸은 그 어느 때도 느끼지 못한 치명적인 폭발 속에서 점점 더 세포의 섬세한 촉각들을 곤두세웠다.
달빛이 동쪽으로 넘어가 태양과 바통을 넘겨받도록 그의 젊은 육체는 지칠 줄 모른 채 끊임 없이 자신의 남성을 일으켜 세웠고, 나 역시 마를 줄 모르는 바다가 되었다. 그의 몸에서 흘러내린 땀들이 진한 빗줄기처럼 내 몸 위에 뚝뚝 떨어졌다. 나는 그를 바싹 끌어안았고 우리의 체액은 뒤엉킨 채 하나가 되었다. 그제서야 둘의 몸은 고요한 강으로 흘러 들어가 깊은 잠에 빠졌다. 모처럼의 꿀 같은 잠이었다.
눈을 뜨자 카짐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욕실로 들어가 세차게 떨어지는 차가운 물줄기에 온몸을 맡겼다. 하지만 타월로 물기를 제거하자마자 이내 몸은 다시 펄펄 끓어 올랐다. 카짐 전에 마지막으로 잠자리를 했던 남자가 떠올랐다. 친구의 소개로 만나 두 세 번 데이트를 했던 남자였다. 머리가 살짝 벗겨졌고 바스락거리는 잎사귀처럼 마른 40대 초반의 사업가였던 그는, 결혼할 시간조차 없이 바쁘게 살았다고 했다. 이혼경력 같은 건 상관없어요. 맞지 않으면 같이 살 수 없는 거죠. 그리고 내가 여전히 20대 처녀 같아 보인다며 느글느글한 웃음을 날렸다. 나는 그가 좋지도 싫지도 않았지만, 강남에 빌딩 몇 채 있다는 어마어마한 재산에 약간은 끌렸다. 하지만 그는 나와 힘겹게 잠자리를 하고는 마지막으로 한마디를 던지고 더 이상 전화조차 안 했다. 당신은 불감증 환자 같아.
서둘러 아직 발도 디뎌보지 못한 석회산으로 향했다. 하얀 얼음가루를 뿌린 듯한 산이 계단식 논마냥 층층이 펼쳐져 있었고, 그 안엔 사진처럼 파란 하늘을 담은 물웅덩이들이 반짝였다. 신발을 벗고 발을 담갔다. 미지근한 물이 몸의 열기를 데웠다. 물 웅덩이 주변으로 켜켜이 쌓인 석회봉들이 마치 뜨겁게 흐르다 굳어버린 용암 같았고, 어둠 속에서 물결치듯 흔들렸던 카짐의 몸 같았다. 나는 파묵칼레의 또다른 명소라는 히에라폴리스의 고대 원형극장도 보지 않은 채 서둘러 마을로 내려왔고 호텔방 구석에 처박혔다.
혼자 숨만 헐떡거리면서 몇 시간 동안 침대에 누워있다가, 방안에 어둠이 가라앉기 시작하자 벌떡 일어났다. 프런트로 내려갔다. 없었다. 식당으로 갔다. 없었다. 수영장으로 갔다. 카짐은 노란 불빛이 흐르는 수영장 물을 내려다보면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나는 뛰어가서 그의 손을 잡아 끌고 싶은 충동을 참았다. 천천히 그에게 다가갔다. 그가 나를 돌아보았다. 그의 입가엔 은은한 미소가 감돌았다. 그는 담배를 발바닥에 비벼 끄고는 아무 말 없이 객실이 있는 건물을 향해 걸어갔고, 나는 그의 그림자를 밟다가 나란히 걸었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내 손에 따듯한 기운이 느껴졌다. 그의 손이었다. 우리는 첫사랑에 빠진 초등학생들처럼 손을 맞잡고 천천히 걸었다. 계단 앞에 이르자 그는 나를 벽으로 밀어붙였다. 내 목덜미에 그의 입술이 닿았고, 내 가슴에 그의 손이 닿았다. 그리고 어린아이가 손가락을 빨 듯, 그의 입술은 내 입술을 반복적으로 빨아들였다. 계단 위에서 누가 내려오는 소리가 나지 않았더라면, 그가 그 자리에서 내 옷을 벗긴다한들 막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아쉬운 연인들처럼 떨어졌고, 나는 내 방으로 돌아왔다. 카짐이 곧 따라올 것이라고 기대하면서.
침대에 아이처럼 웅크려 누웠다. 심장의 고동소리가 들려왔다. 숨도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누군가를 미치도록 사랑한 적은 있었지만 누군가와 미치도록 육체를 나누고 싶었던 적은 지금까지의 기억에 없다. 나는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지금의 상태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몰랐다. 그리고 내 몸 안에 숨겨져 있던 욕망의 크기에 놀라 두려우면서도, 그 욕망의 노예가 되고 싶었다. 내 은밀한 곳에 고여있는 물기가 느껴졌고, 그것을 카짐의 혀가 핥아주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몇 시간이 지나도록 카짐이 오지 않자, 나는 그 어떤 남자에게라도 몸을 내어주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바쁜 일이 있는 걸까. 나는 밤새 카짐을 기다리며 불면의 사막 위를 거닐었다. 그러나 태양이 잠든 사물들을 모두 깨우도록, 카짐의 그림자조차 나타나지 않았다.나는 불안과 초조 속에 빠져들었다. 아예 며칠동안 카짐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진짜 내가 왜 이러나 싶었고 스스로가 한심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카짐의 엄마에게 물으니, 카짐은 군대 간 친구의 면회를 갔다고 했다. 내게 언급조차 없이 떠난 걸 보니 그 날 밤의 일은 안중에도 없는 것임에 틀림없었다. 그냥 달빛에 젖어서 아님 술김에 자기도 모르게 흥분된 육체의 욕망을 내 몸 위에 쏟아 붓고는 떠나버린 것이다. 아마도 나 역시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그럼 그 다음날 계단 앞에서 한 키스를 무엇이었을까. 도대체 나를 뭘로 보고. 마음대로 갖고 놀아도 되는 개방적인 외국여자쯤으로 생각했던 걸까. 나는 일찌감치 파묵칼레를 떠나야겠다고 생각했다. 시간이 해결해 줄 문제 같았다.
짐을 꾸리고 있는데 버스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테라스로 다가갔다. 버스에서 카짐이 내리고 있었다. 빌어먹을. 가슴이 쿵쾅거렸다. 나를 갖고 놀아도 상관없었다. 제발…
곧 이어 복도쪽에서 뛰어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렸고 문을 쾅쾅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깊은 숨을 몰아쉬며 문을 열었다. 카짐은 거칠게 들어와서는 나를 끌어안았다. 그의 두근거리는 심장소리가 터질 듯이 나의 혈관을 타고 온 몸을 휘감았다. 미안해. 나도 내가 이렇게 미칠 것 같을 줄 몰랐어. 보고싶었어. 그의 목소리는 절박했고, 나는 행복했다. 나는 그의 단단한 가슴을 힘껏 방망이질 하듯 때렸고, 그는 나의 두 손을 잡더니 나를 번쩍 들어올려 침대에 던졌다.
우린 한 낮의 더위가 고인 방 안에서 숨이 막힐 듯한 열기를 나눴다. 땀에 젖은 그의 목덜미에서 젖비린내 같은 아이의 냄새가 났다. 나는 그의 몸을 더듬어 맛을 봤고, 그 역시 닳아 없어질 때까지 내 몸을 핥고 또 핥았다. 그는 능숙한 탐험자처럼 정확히 나의 은밀한 동굴 속을 찾아 들어왔으며, 그의 움직임을 따라 나는 하프처럼 머리끝부터 발가락 끝까지 진동했다. 그는 내 위에서 물결처럼 출렁거렸고, 나는 그의 단단해진 젖꼭지를 구슬아이스크림처럼 빨아 먹었다. 그는 간헐적으로 신음을 터뜨렸고, 그 소리는 지구상의 그 어떤 소리보다 나를 즐겁게 했다. 나는 그 순간이 영원히 지속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뜨겁던 태양이 나뭇잎을 금빛으로 물들일 때까지, 온 몸의 수분이 빠져나가 탈진으로 나동그라질 때까지, 우리는 서로를 녹이고 또 녹였다.
그 날 이후로 카짐은 나를 기다리게 하지 않았다. 그는 투어와 여행자 ‘납치’로 바쁜 하루 일과를 보낸 뒤, 하루도 빠짐없이 조용히 내 방을 찾았고 우린 한참을 뒹굴다 함께 떠오르는 태양을 맞았다. 낮에는 책을 읽거나 수영을 하면서 보냈지만, 내 머릿속에는 온통 카짐 생각 뿐이었다. 가끔씩 마주치는 그의 엄마는 불안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지만 아무런 말은 하지 않았다.
1주가 지나고 2주가 지났다. 네 몸은 맛있게 생겼어. 네 다리로 내 다리 좀 감아줘. 하루종일 너랑 하는 생각만 했어. 이젠 꿈에서도 너랑 해.. 2주동안 우리가 나눈 대화들이란 그런 수준의 것들이었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그런 가식 없는 욕망의 부딪침에 점점 더 자극이 되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우리는 더 대담해졌고, 그만큼 쾌락과 열정의 크기는 커져만 갔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 쾌락에 비례해 두려움이 새싹처럼 쑥쑥 자라났다. 열기와 흥분에 휩싸인 감정이 언젠가는 식어버릴까 두려웠고, 이것이 사랑일까봐 더더욱 두려웠다. 이건 사랑이 아니라 욕망이나 쾌락에 불과하다고 스스로 되뇌어도, 이 터져버릴 것 같은 심장의 두근거림은 사랑할 때 느끼는 감정과 다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 강렬했다. 나는 두려우면 두려울수록 점점 더 많이 그의 육체를 흡수했다. 이제 그가 곁에 있지 않는 동안에도 항상 내 안에 떨림으로 남아있는 그를 느낄 수 있었고, 그 느낌은 첫키스의 몇 백배만큼 황홀했다. 이게 사랑이 아니라면 뭘까. 사랑이라고 한들 뭐가 달라질 수 있을까. 혼란스러웠다.
이 호텔에 머문 지 3주째로 접어들던 어느날, 카짐의 엄마가 나를 조용히 식당 구석으로 불렀다. 그녀의 양 볼은 더욱 발개져 앵두를 양쪽에 매단 것 같았다. 자세히 보니 깊게 파인 눈이 카짐을 많이 닮았다. 그녀는 차이를 한 잔 따라주었다. 나는 두 손으로 공손히 그녀가 따라주는 차이를 받았다. 왠지 그렇게 예의를 차려야만 할 것 같았다. 그녀는 한참을 망설이더니 입을 열었다.
카짐과 결혼할 생각이야?
결혼… 갑자기 무슨 소리인가 싶었다. 우리 둘이 만나는 것은 이미 눈치채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도 그렇지 만난 지 얼마나 됐다고 결혼이라니…
내가 물어보니까 카짐은 너랑 결혼할 수도 있다던데? 네 생각도 그래?
나는 그 때 알았다. 카짐은 이 육체적 관계를 사랑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카짐의 엄마는 나를 부르기 전 카짐에게 먼저 물었을 것이다. 어쩌자고 저 외국여자와 그러냐고. 그럴 때 카짐은 나와 결혼할 수도 있다고 그렇게 대답한 것이다. 터키 사람 답지 않게 과묵한 그가 그런 말을 했다면 그건 결코 빈 말이 아니었다. 갑자기 울컥 가슴에 치밀어오르는 뜨거운 무엇이 느껴졌다.
하지만 나는 침착하게 카짐의 엄마에게 결혼 같은 것은 생각해본 적이 없다고 또박또박 대답했다. 그녀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아무런 표정의 변화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결혼이 사랑과, 더더군다나 욕망과 동의어가 아니라는 것쯤은 나보다 더 잘 알고 있을 테니까.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내게 다가와 가죽같이 투박한 두 손으로 내 오른손을 움켜잡았다.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그녀는 서투른 영어로 더듬거리며 말을 이었다.
더 이상 아들에게 상처주지 말고 끝냈으면 좋겠어. 아빠 없이 자란 불쌍한 아이야. 그 애는 이제 겨우 스물 셋이라구.지난해 나는 5년간의 결혼생활에 마침표를 찍었다. 두 살 차이였던 남편과 나는 둘 다 대학 졸업반일 때 소개팅에서 만났다. 첫 눈에 서로에게 반한 우리는 데일 것 같이 뜨겁게 사랑을 시작했고 만난 지 1년 만에 결혼했다. 하지만 그 사랑은 시간과 함께 서서히 식어갔고, 결혼 5년째로 접어들었을 때 우리의 삶에 더 이상 열정 같은 건 없었다. 작은 출판사에 다녔던 나는 집과 직장을 오가는 반복되는 삶에 지쳐있었고, 대기업에서 치열한 승진싸움에 밀려 술과 함께 뱃살이 늘어가던 남편 역시 그러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특별히 결혼생활에 불만이 있는 건 아니었다. 남들처럼 휴가 때면 함께 여행을 떠났고, 주말이면 영화를 보고 외식도 했다.
그러던 어느날 수많은 스팸메일 사이에서 한 때 익숙했던 이름이 눈에 띠었다. 대학 시절 2년간 사귀었던 연인이었다. 사랑했지만 그는 군대로 떠났고,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휴가를 나와서는 나를 차버렸다. 오랜만에 그의 이름을 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심장이 뛰었다. 떨리는 손으로 메일을 클릭했다. 결혼한다는 소식과 함께 한번 얼굴이나 보자는 내용이었다. 어떻게 보면 이상하고 어떻게 보면 별로 이상할 것도 없었다.
나는 며칠을 망설이다 그에게 전화를 해서 약속을 잡았다. 설레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일 것이다. 그래도 나는 그저 얼굴이나 보고 싶었다. 아니다. 반복되는 일상에서 뭔가 다른 일이 일어나길 내심 기대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거의 10년 만에 만난 그는 학생시절의 풋풋함은 사라졌고 얼굴에 약간의 살집이 붙었지만, 그것이 날카롭고 치열했던 그의 인상에 넉넉함이란 미덕을 선사했다. 그도 그럴 것이 가난한 고학생이었던 그는 이제 커다란 로펌에서 자칭 잘 나가는 변호사가 되어있었다.
우리는 근사한 레스토랑에 가서 저녁을 먹었고, 특급호텔의 스카이라운지에서 술을 마셨다. 그는 연애시절 나를 이런 곳에 데려가지 못해 마음에 걸렸다고 했고, 술에 더 취하자 자신이 사랑했던 여자는 나뿐이었다고 말했다. 그 때 나를 떠난 건 자신이 너무 가난했기 때문이라면서.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조금은 선을 넘는다는 느낌이 들긴 했지만 어차피 얼마 뒤면 결혼할 사람이어서 크게 부담이 되진 않았다.
그 날 이후 이따금씩 이메일을 주고 받았고, 가끔 만나 데이트를 즐겼다. 만나는 횟수는 점점 잦아졌고 그 때마다 나는 남편에게 직장 회식을 핑계로 댔다. 우린 대학시절처럼 함께 영화를 봤고, 밥을 먹었고, 술을 마셨다. 남편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가끔 만나는 남자 대학 동창도 몇 있는데 뭐 대수일까라며 만남을 합리화시켰다.
그러던 어느날 그가 술에 취해서는 이렇게 말했다. 네가 이혼한다면, 나도 결혼하지 않을게. 그제서야 내 현실의 앙상한 가지들이 정신을 후려쳤다. 앙상했기에 더 아팠다. 그의 눈에는 물방울이 맺혔다. 이렇게 시작하는 게 아니었다. 그럼 마지막 부탁을 들어줘. 한 번만 너를 갖고 싶어. 가을 바람에 무심히 흔들리는 갈대처럼 잠시 마음이 움직였지만, 나는 그 자리에서 일어났고 더 이상 그를 만나지 않았다.
며칠 뒤 몸이 안 좋아 병원을 찾았다. 클라미디아라는 균에 감염됐다는 진단을 받았다. 성병이었다. 의사는 부부 사이가 악화될 것을 의식했는지 그건 꼭 성관계에 의해서 감염되는 것은 아니에요,라고 덧붙였다. 하지만 돌아와 인터넷을 뒤져보니 거의 성관계에 의해 감염되는 균이었다.
그 날 밤 나는 혼자서 식탁에 앉아 TV 드라마의 주인공처럼 맥주를 마셨다. 한 병 두 병… 술병이 늘어날수록 처참한 기분에 젖어 들었다. 그래도 구질구질하고 싶진 않았다. 새벽 2시가 넘어 남편이 문을 따고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나 성병이래. 당신 병원 가서 검사 받아 봐. 남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나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침실로 향했다. 사랑이 적어도 환멸이 되지는 않기를 바라면서.
쨍그랑. 돌아보니 유리 파편이 사방에 널려있고, 벽엔 반짝이는 유리가루와 얼룩이 선명했다. 내가 마시다 남긴 맥주병을 벽을 향해 던진 남편은 분노에 찬 폭풍처럼 소리쳤다. 어떤 놈이랑 자고 와서 나보고 검사하래? 내가 모를 줄 알고? 너 다른 놈이랑 바람 났잖아. 내가 니 이메일 다 봤어. 이 창녀 같은 년. 나는 그 순간 나의 결혼생활이 끝나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깨진 병을 더 이상 이어 붙일 수 없는 것처럼. 그의 발악이 이어졌다. 그래 나도 술집여자랑 잤다. 너 바람 피는데 나라고 못 그러니?
아내의 외도를 의심해 홧김에 술집여자와 관계를 맺고 내게 성병까지 옮긴 남편과, 단 한번도 잠자리를 가지지는 않았지만 다른 남자에게 잠시 마음을 품었던 나 중에서 누가 더 잘못한 건지는 잘 모르겠다. 아마도 도덕적으로는 내가 더 잘못했겠지. 돌팔매질을 맞아도 상관없었다. 아무튼 분명한 건 이제 나는 조금의 일탈도 허용하지 못하는 결혼제도가 지긋지긋해졌고, 환멸로 변해버린 이 사랑을 안고 나갈 조금의 의지도 없었으며, 무엇보다도 시침을 뚝 뗀 채 나의 삶을 지켜보고 뒤져본 남편이 무서웠다. 그로부터 오래지 않아 우리는 이혼서류에 도장을 찍고 갈라섰다.내일이면 파묵칼레에 들어온 지 한 달이다. 오늘 따라 일찍 호텔로 돌아온 카짐은 내 손을 잡고 산으로 향했다. 우리는 들뜬 어린아이처럼 뛰어서 단숨에 산에 올랐다. 그는 석양을 제대로 볼 수 있는 포인트가 있다며 안내했다. 이미 소문난 명당인지 많은 관광객들이 자리를 잡고 떨어지려는 태양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우리도 빈 자리를 찾아 나란히 앉았다. 헐떡거리는 그와 나의 숨소리가 사그라질 때까지 우리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지는 해처럼 분위기가 가라앉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내 손을 꼭 잡았다. 혈관이 터져버릴 것처럼 뜨거웠다.
내일부턴 숙박비 지불하지 말고 있어. 넌 내 가족이나 다름 없으니까. 원한다면 방도 더 좋은 데로 옮겨줄게.
아마도 내가 떠날까봐 선수를 치는 것 같았다. 나는 눈물을 흘리지 않고 울었다. 창자가 비틀리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지만, 내가 누렸던 행복을 생각하면서 참았다. 그리고 나는 잠잠한 호수가 되어 영원히 내 마음을 그 곳에 묻어버리기로 결심했다. 내가 그를 처음 본 순간 명치끝이 아려왔던 건, 왠지 눈물이 났던 건, 그가, 바로 내가 잃어버린 과거였기 때문이었다. 나는 또 그 과거를 되풀이할 수 없었다. 마지막으로 맞잡은 그의 손을 꼭 쥐었다. 카짐은 나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여기에 남아있어. 나와 함께.
…
사랑해.
…
처음엔 잘 몰랐었는데 지금은 확실히 알겠어. 널 보낼 수 없어.
…
사랑한단 말이야. 사랑한다구.
…
(가슴에 손을 대며) 여기가 너무 아파. 제발 가지마.
…
너도 날 사랑한 거 아니었어?
어떤 말을 해도 내가 계속 침묵 속에 잠겨있자, 카짐의 목소리는 점점 떨려왔다. 나는 살아오면서 ‘사랑’이란 말을 얼마나 많이 사용했을까. 글로든 말로든 수 십번 아니 수 백번 그 말을 읊조렸을 것이고, 또 그 만큼 그 말을 들었을 것이다. 사랑해. 사랑해. 널 위해 뭐든지 할 수 있어. 하지만 바람이 훅 불면 사라지는 신기루처럼, 사막 위에 흡수되어 흔적조차 없이 사라지는 물방울처럼, 지구라도 뒤흔들 수 있을 것 같던 사랑은 어느새 내 인생에서 서서히 뒷걸음질쳐 달아나 버렸다. 그런데 나는 또다시 이 사랑이란 말을 들으며 가슴이 터질 것 같은 느낌에 사로잡혀 있다니….
구름 사이로 태양이 수 갈래의 가지를 뻗으며 천천히 가라앉았고, 태양을 등지고있던 나무들은 검은 실루엣을 만들며 어둠 속에 흡수되어갔다. 이내 사방엔 밤이 내려앉았고, 아름답던 하얀 산들은 빛을 잃자 회색의 단단한 시멘트처럼 우리를 무섭게 둘러쌌다. 나와 카짐은 물에 발을 담근 채 한참을 침묵 속에서 앉아있었다. 관광객들은 하나 둘 떠났고, 이제 우리만 남았다. 나는 그를 쳐다봤다. 그의 입술은 사랑을 잃을까 싶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연약한 나비 날개처럼 파르르 떨고 있었다.
사랑해. 나도 너와 함께 있고 싶어. 그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끝내 입술을 빠져 나오지는 못했다. 그의 말대로 나는 그를 사랑하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내 인생의 그 어떤 사랑보다도 더 많이. 하지만 인류가 오랜 역사를 거쳐 만들어낸 이 사회의 구조상 사랑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결혼하지 못하면 결국은 헤어질 수밖에 없다. 나는 알고 있다. 내가 그와 결코 결혼할 수 없다는 것을. 외부적 난관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이방인과의 자유로운 사랑과-더더군다나 육체적인 사랑과-, 현실에 얽매일 수밖에 없는 결혼은, 결코 섞일 수 없는 물과 기름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머리의 기억보다 더 오래간다는 몸의 기억이 평생 나를 괴롭힐 지라도, 이 사랑은, 바로 지금, 내가 끝내야만 했다.
그를 쳐다봤고 아주 천천히 고개를 흔들었다. 이내 그의 커다란 눈동자엔 그렁그렁한 물방울이 맺혔다. 나는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고, 석회산의 부드러운 감촉을 느끼며 천천히 걸어 내려왔다. 부드러워서 따뜻해서 좋았다. 그러지 않았더라면 나는 그 자리에서 망치에 맞은 얼음처럼 산산이 부서져버렸을 것이다. 이제 내 마음은 파묵칼레의 따뜻한 물웅덩이속으로 녹아내려 이대로 영원히 이 곳에 고여있겠지.
나는 방황하는 별빛 사이에서 한참을 떠돌다 호텔로 돌아왔다. 내일 아침 일찍 이스탄불로 떠나기 위해 짐을 꾸렸다. 이 곳에 들어왔던 그대로 트렁크 하나와 작은 손가방 하나만을 지니고 떠나면 된다. 침대에 누웠다. 잠시 그와 결혼하는 상상을 했다. 하얀 석회산을 마주하고 날리는 살구나무 꽃의 감미로운 향기 아래서 얼마간은 꿈결처럼 행복하겠지. 맑은 잿빛이 감도는 그의 눈동자와 그의 순결한 체취와 나를 미치도록 즐겁게 하는 그의 신음소리 속에서 어쩌면 하루하루가 구름 위를 걷는 기분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간이 한 겹 두 겹 꽃잎처럼 쌓이고, 낯선 땅이 익숙한 일상이 되어감에 따라, 우리는 서로의 다름에 어리둥절하다가 미워하다가 결국은 치를 떨며 등지게 될 것이다. 같은 나라에서 태어나 비슷한 환경에서 자란 사람들도 섞이기 힘든 데, 하물며 몸을 섞는 거 외엔 아무것도 공유한 것 없는, 열 살이나 어린 이슬람 국가의 남자와 생각과 삶을 함께 한다는 건 소설 속에서도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 아니 그러기엔 현재 내가 너무 많은 것을 가졌고, 이미 너무 많은 것을 잃었다.
쾅. 쾅. 쾅. 심장을 두드리듯 천둥 같은 노크 소리가 들렸다. 나는 천천히 다가가 문을 열었다. 예상대로 카짐이었다. 부어있는 눈꺼풀 아래에선 폭포 같은 눈물이 쏟아지고 있었다. 스물 셋이란 나이엔 사랑을 잃는다는 것은 감당하기 힘든 일이다. 나는 카짐의 손을 잡고 침대로 이끌었다. 나란히 침대에 누웠다. 카짐은 달팽이처럼 몸을 웅크려 내 품에 안겼다. 나는 아이에게 젖을 먹이는 엄마처럼 그를 따스하게 품었다. 아주 천천히 등을 토닥토닥 두드리면서. 그리고 그의 귓가에 부드러운 자장가 한 가락을 불어넣었다. 그는 한참을 흐느꼈지만 울음은 점점 잦아졌고 결국은 작은 숨소리만을 내쉬며 편안한 어린아이처럼 잠이 들었다. 밤새 우리는 그렇게 달콤한 꿈을 함께 꾸었다. 평생 한 번 꿀까말까 한 달콤한 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