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종이감옥 / 나희덕

지성준 2018. 6. 12. 13:57

나희덕/ 종이감옥

 

 

그러니까 여기, 누구나 불을 끄고 켤 수 있는 이 방에서, 언제든 문을 잠그고 나갈 수 있는 이 방에서, 그토록 오래 웅크리고 있었다니

 

묽어가는 피를 잉크로 충전하면서

책으로 가득 찬 벽들과

아슬아슬하게 쌓아놓은 서류 더미들 속에서

이 책에서 저 책으로 이 의자에서 저 의자로 옮겨다니며

종이 부스러기나 삼키며 살아왔더니

 

이 감옥은 안전하고 자유로워

방문객들은 감옥이라는 걸 알아차리지 못했지

간수조차 사라져버렸지 나를 유폐한 사실도 잊은 채

 

여기서 시는 점점 상형문자에 가까워져간다

입안에는 말 대신 흙이 버석거리고

종이에 박힌 활자들처럼

아무래도 제 발로 걸어 나가기는 어려울 것 같다

썩어문드러지든지 말라비틀어지든지

 

벽돌집이 순식간에 벽돌무덤이 되는 것처럼

종이벽이 무너져내리고

잔해 속에서 발굴될 얼굴 하나

 

종이에서 시가 싹트길 기다리지 마라

 

그러니까 오늘, 이 낡은 방에서, 하루에 30분 남짓 해가 들어오는 이 방에서, 위태롭게 깜박거리는 것이 형광등만은 아니라는 걸 알게 되다니